2 토요일 아침, 그녀는 커튼을 걷었다. 밤사이 비가 왔는지 맞은편 건물의 유리창이 맑았다. 구름 몇 덩이가 하늘에 떠 있었다. 그녀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바람이 들어와 잠옷 소매를 스쳤다. “추워.” 주방에 있던 남편이 말했다. “잠깐만 열어둘게.” 그녀는 창틀에 팔꿈치를 얹고 밖을 내다보았다. 구름 하나가 건물 뒤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양쪽으로 둥글게 부푼 모양이 꼭 토끼 같았다. “저거 봐.” 남편이 물컵을 들고 다가왔다. “뭘?” “구름. 토끼처럼 생겼잖아.” “어디가 귀야?” “왼쪽. 아니, 지금은 좀 무너졌다.” 그가 고개를 기울이는 사이 구름은 벌써 다른 모양이 되었다. 그녀는 아쉽다는 듯 창밖을 더 들여다보았다. “오늘 뭐 하고 싶어?” 남편이 물었다.

3 “갑자기?” “오늘 날씨 좋으니까.” 그녀는 돌아서서 식탁에 놓인 책을 보았다. 며칠째 같은 곳에 책갈피가 꽂혀 있었다. “뷰 좋은 카페에 가고 싶어. 거기서 책 읽고 커피 마시면서 오래 앉아 있고 싶다.” “그럼 가자.” “오늘?” “오늘 가고 싶다며.”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살폈다. “당신 할 일 없어?” “있어도 오후에 하면 돼.” “또 밀어두지 말고.” “오후에 해도 되는 일이야.” 그녀는 창문을 닫고 책을 가방에 넣었다.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가 두 번이나 나왔다. 처음에는 가방을 바꾸러, 두 번째는 책을 한 권 더 가져갈까 싶어서였다. “한 권이면 충분하겠지?” “오늘 다 읽을 거야?” “모르지. 재미있으면.” 남편은 신발을 신고 현관에서 기다렸다. 그녀는 결국 처음 골랐던 책 한 권만 들고 나왔다.

4 차 안은 햇볕 때문에 조금 따뜻했다. 그녀는 안전벨트를 매고 차창을 내렸다. 도로 옆 가로수는 위쪽부터 색이 바뀌고 있었다. 아직 푸른 잎들 사이로 노란 잎 몇 장이 섞여 있었다. “저 나무는 벌써 가을이네.” “그러게.” “이런 날엔 소풍 가야 하는데.” 남편은 앞차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오늘 갈까?” “오늘은 책도 가져왔고. 카페에 가자.” “그러자.” “소풍은 다음에. 돗자리도 있어야 하고.” 그녀는 창밖으로 손을 조금 내밀었다. 바람이 손가락 사이로 빠르게 지나갔다.

5 카페는 언덕 위에 있었다. 통창 아래로 주택가가 내려다보였고, 멀리 있는 산은 옅은 파란색으로 보였다. 다행히 창가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남편은 주문하러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밤 케이크 먹을래?” “있어?” “마지막 한 조각 남았대.” “그럼 먹어야지.” “커피는 늘 마시는 걸로?” “응. 당신 것도 시켜.” 커피가 나올 때까지 그녀는 책의 접힌 부분을 펴고 지난번 읽은 대목을 찾았다. 몇 줄을 읽다가 창밖에 시선이 머물렀다. 맞은편 지붕 위로 구름 그림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남편이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책은?” “읽고 있어.” “방금은 밖을 보고 있던데.” “잠깐 쉬는 중이야.” “두 쪽 읽고?” 그녀가 웃으며 케이크 접시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6 “이거 먼저 먹고.” 밤 케이크는 생각보다 덜 달았다. 그녀는 작은 조각을 떼어 남편의 접시에 놓았다. 그는 먹어 보더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괜찮네.” “그렇지?” 그 뒤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남편은 휴대전화로 기사를 읽었고, 그녀는 책을 읽었다. 카페 안쪽에서 그릇을 치우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의자를 끌었다. 창문 밖에서는 사람들이 공원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책장을 넘기다가 고개를 들었다. “여기 좋다.” “응.” “시간이 좀 천천히 가는 것 같아.” 남편은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이번에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창밖에 떠 있던 큰 구름이 산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당신 기억나?” “뭐가?” “나 소풍 가고 싶다고 했던 거.” “기억나.”

7 “하늘 잘 보이는 데 가서 하루 종일 앉아 있자고 했잖아. 도시락도 싸 가고.” “당신은 도시락 싸는 거 싫어하잖아.” “그날은 쌀 수 있지. 김밥은 어렵고, 주먹밥 정도는.” “사 먹어도 돼.” “소풍인데?” “소풍 가서 먹으면 그게 도시락이지.”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과일은 내가 씻어 갈게.” 남편은 컵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녀가 소풍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늘 같은 대답을 했다. 다음에 가자고. 날이 더 따뜻해지면, 일이 조금 줄어들면, 주말에 비가 오지 않으면. 그녀는 포크 끝에 남은 케이크를 먹고 책을 덮었다. “다 읽었어?” “아니. 집에 가서 읽을래.” “왜?” “여기서는 자꾸 밖을 보게 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빈 컵을 쟁반에 올렸다. 카페를 나와서는 언덕길을 걸어 내려갔다. 햇빛이 비탈에 비스듬히 닿았다. 오래된 주택의 담장 아래에는 화분이 여럿 놓여 있었다. 그녀는 작은 국화가 핀 화분 앞에 멈췄다.

8 “이런 건 누가 심었을까?” “집주인이겠지.” “당신은 가끔 너무 정확하게 대답해.” “정확한 답이잖아.” 그녀는 먼저 걸어갔다. 남편이 몇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골목 끝에 팬시숍이 있었다. 유리문에 붙은 글자가 조금 바랬고, 문 안쪽에는 엽서와 작은 수첩들이 빼곡했다. 그녀는 그냥 지나치려다가 걸음을 돌렸다. “잠깐 들어가자.” “뭐 살 건데?” “노트.”

9 “집에도 있잖아.” “그건 다른 노트지.” 가게 안에서 그녀는 노트 몇 권을 펼쳐 보았다. 줄 간격이 너무 좁은 것은 내려놓고, 종이가 지나치게 하얀 것도 제자리에 꽂았다. 남편은 옆에서 엽서를 구경하다가 그녀가 고른 노트를 봤다. 표지는 연한 하늘색이었다. 글자도 그림도 없었다. “이거 예쁘다.” “평범한데.” “그래서 예뻐.” 그녀는 노트를 계산대로 가져갔다. 작은 검정 펜도 하나 집었다. 계산을 마치고 가게 앞에 나오자 남편이 봉투를 받아 들었다. “오늘 일 적으려고?” “응.” “뭐부터 쓸 건데?” “일단 날짜부터.” “그다음은?” “집에 가서 생각해야지. 아직 오늘이 안 끝났는데.” 남편은 봉투를 접지 않게 조심해서 들었다.

10 조금 더 걷다가 두 사람은 차를 가지러 돌아갔다. 그녀는 보도블록의 틈을 밟지 않으려고 발걸음을 넓혔다. 남편이 옆에서 보다가 따라 했다. “뭐 해?” “당신이 하는 거.” “하지 마. 둘 다 이러고 가면 이상하잖아.” 그러면서도 그녀는 다음 칸을 크게 건너뛰었다. 저녁은 집 근처 식당에서 먹었다. 삼겹살을 굽는 동안 그녀는 상추를 두 장씩 포개 놓았다. 남편이 고기를 뒤집으려 집게를 들자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건 조금 더 놔둬. 가장자리 바삭한 게 좋아.” “아까는 빨리 달라며.” “배고픈 거랑 맛있게 먹는 건 다른 문제야.” 막걸리도 한 병 시켰다. 그녀는 한 잔을 다 마시지 못하고 남편의 잔에 나눠 주었다. 식당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낮보다 두꺼워져 있었다. “오늘 많이 걸었네.” 그녀가 말했다. “다리 아파?” “조금. 집에 가면 바로 씻고 누워야겠다.” “노트는?”

11 “누워서 쓸 거야.” 그녀는 상추에 고기와 마늘을 올렸다가 남편 쪽으로 내밀었다. “먹어.” “당신 먹어.” “하나 더 만들면 되지.” 남편이 상추쌈을 받아 먹었다. 그녀는 자기 것을 만들며 물었다. “내년에는 소풍 갈 수 있겠지?” “가자.” “정말?” “응.” “또 날 좋을 때 바쁘다고 하지 말고.” 남편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 좋을 때 가자.” 집에 도착했을 때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골목 입구에 차를 세우자 그녀가 가방을 뒤적였다. “노트.” 남편은 뒷좌석에 놓인 봉투를 집어 주었다. “여기 있어.”

12 “내가 또 두고 갈 뻔했네.” 그녀는 봉투를 무릎에 올려놓고 잠시 앉아 있었다. 차에서 내리기 아쉬운 사람처럼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구름이 거의 남지 않았다. “오늘 좋았다.” “응.” “당신은?” “나도.”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한 것 같은데.” “나도 카페 좋았어.” 그녀는 남편을 한번 쳐다보고 차 문을 열었다. “먼저 올라갈게.” “그래.” 골목을 걸어가던 그녀가 뒤돌아 손을 흔들었다. 남편도 손을 들어 보였다. 그녀는 몇 걸음 더 가다가 다시 돌아봤다. 그가 아직 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모퉁이를 돌았다. 남편은 시동을 끄지 않았다. 조수석에는 하늘색 노트를 넣은 봉투가 있었다. 그는 그걸 들고 차에서 내렸다가,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꽃집에 들르려면 서둘러야 했다.

13 하늘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해가 지고 있었다. 그는 꽃 한 다발을 사서 익숙한 길을 걸었다. 언덕 위에서는 낮에 그녀가 봤던 주택가와 먼 산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남편은 그녀의 이름이 적힌 자리 앞에 꽃을 놓았다. 그리고 봉투에서 노트를 꺼냈다. 첫 장은 깨끗했다. “당신이 쓰려고 했는데.” 그는 노트의 첫 줄에 오늘 날짜를 적었다. 무엇을 더 써야 할지 몰라 펜을 쥔 채 오래 앉아 있었다. 결국 그 아래에는 짧게 한 문장만 썼다. 오늘은 당신이 하늘을 오래 봤다. 그는 노트를 덮었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 함께 소풍을 가자는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이곳에 그녀를 모신 뒤에야, 그녀가 좋아하던 하늘이 이렇게 넓게 보인다는 걸 알았다. 가을바람이 불었다. 그는 조금 전까지 그녀가 앉아 있던 쪽을 비워 두고, 그 옆에 한동안 더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