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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문학협회 이삭문학협회 이삭문학협회이삭제2집 시 전문 동인지 시 전문 동인지 제2집 이삭
발간사 이삭 하나가 시가 되기까지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으로 무한을 쥐고 찰나에 영원을 붙든다.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의 전조」 시는 크게 말하기보다, 소외된 작은 것 하나를 오래 바라보며 그 아픔에 공감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만나고 들꽃 한 송이에서 천국 을 발견하는 눈, 그 눈이 시를 쓰게 합니다. 2019년,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작은 씨앗 하나 를 품고 이삭문학협회를 창립했습니다. 매월 이어온 월례회 속에서 씨앗은 뿌리를 내렸고, 시낭송회와 시 화전을 통해 우리의 언어는 목소리를 얻어 시민들의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함께한 시간 이 오늘 『이삭』 제2집이라는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번 동인지에는 21명 회원들의 삶이 담겨 있습니 다. 저마다 걸어온 길은 달라도 시를 향한 마음만큼은 하나였습니다. 혼자 쓰는 시일지라도 함께 읽고 공감 하며 성장할 때, 그 결실은 더욱 풍성해집니다. 서로 다른 목소리가 만나 하나의 화음을 이루듯, 우리의 시 또한 함께할 때 더욱 깊은 울림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이삭은 흩어져 있는 개개의 낟알만이 아닙니다. 그 것은 모여야 비로소 이름이 되고, 함께 견뎌야 비로소 생명이 됩니다. 우리도 수많은 이야기와 함께한 시간 이 어우러져 비로소 하나의 ‘이삭’이 되었습니다. 그 이삭은 우리가 걸어온 길이며, 함께 가야 할 방향입니 다. 우리가 걸어온 시간은 서로의 마음을 북돋우며 함 께 익어온 시간이었습니다. 그 마음과 우리들의 이야 기를 담아 『이삭』 제2집을 발간합니다. 이 시집이 누군가의 손에 닿아 잠시 걸음을 멈추게 하고, 메마른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 편의 시가 한 사람의 고된 하루를 따뜻하게 품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일 것입니다.
앞으로도 이삭문학협회는 처음 품었던 순수한 마음 을 잃지 않고, 좋은 시를 쓰는 일을 넘어 시가 서 있 어야 할 자리를 함께 지키겠습니다. 태풍의 계절이 와 도, 추운 계절이 와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더욱 단 단한 이삭으로 영글어 가기를 소망합니다. 『이삭』 제2집의 발간을 위해 정성을 모아 주신 회원 여러분과 편집위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책을 펼치는 모든 독자의 마음에도 시 한 편의 따뜻 한 바람이 오래 머물기를 기원합니다. 2026년 7월 18일 이삭문학협회 회장 이광성 드림
차례 발간사 ···················································· 3 정일근 ················································· 14 遠願(원원)* 경주 남산 신우대 아래의 잠 경주 남산 배한봉 말끝의 늪 토월천 말끝의 늪 토월천 외다리의 새들 이광성 ················································· 22 별거 왜가리는 외발로 읽는다 육박(肉薄) 아벨 방정식을 푸는 세 가지 방법 시간을 가불하다 박원배 ················································· 29 얼어 죽은 사내를 위한 변명 남편을 묻고 하이힐을 신었다 반복되는 신화 물리적 도시 오르톨랑* 부유하는 각도
강지윤 ················································· 39 섬이 된 여자 강아지 하루* 시점 사직 야구장에서 붕어를 낳는 여자 안부 전화 김남숙 ················································· 45 소울메이트 쓸모 있는 기다림 여행 가방 출항 코끼리 다리 만지기 강동환 ················································· 51 달래 아가씨 유월이 오면 숲 서운암 금낭화 청보리밭 장형순 ················································· 57 황학대에 홀로 앉아 기장 아난티의 아침 창립 30주년 기념식 마치고 방문간호 H-가족 드림 9월 인생 강연
조임경 ················································· 64 살아간다는 것은 망명 마중 생각의 틈 봄비 오는 날 오영배 ················································· 70 외 살림꽃 고장 사라진 현재 어떤 점심 고백 송창희 ················································· 76 깨진 신호등 무더위 별 이야기 상처 입은 그대에게 해안선에서 하부광 ················································· 83 낙엽 너를 보내던 날 다대포의 갯벌 온천천 종이컵
정창래 ················································· 89 색경(色鏡)은 거울 되어 오월 꽁치는 불효였다 인생길 꿈 여승익 ················································· 96 허무한 휴일 마주 보기 반가운 소식 기다림 소식(消息) 우수경 ··············································· 102 저녁의 솔기 식어가는 방 반쪽 신호등 무대의 변주 수난시대 이상미 ··············································· 109 기도 환갑 생일상 동백섬을 걷다 아침묵상 해운대 요기니들
노승희 ··············································· 115 갱년기 우울증 길고양이 까미 습작 가을동화 구절초 김연희 ··············································· 121 쑥부쟁이의 꿈 올 삼월에 하지 무렵 별들에게 물어봐 관종 황윤희 ··············································· 127 괜찮다는 말 하나면 어머니 그대를 부르면 내 마음의 풍차 저울 위의 감정들 쫄지 마, 너는 스스로 빛난다 황윤미 ··············································· 133 명품가방 삶을 돌아보며 꽃에 대한 사색 가슴이 뛴다 이별의 후회
김정숙 ··············································· 139 천년의 신비 온천천 믿음의 날개 위에 아버지의 지팡이 가을, 너 참 예쁘다 내 안의 오래된 나무 한 그루 김현성 ············································· 147 행복 방정식 프란치스코의 기도 다리 하나 더 놓게 하소서 가로등과 벚꽃나무 사랑의 수수께끼 정영희 ··············································· 153 만족하며 여유 있는 발걸음 소나무재선충 벗에게 아침에 해설 ··················································· 159 시인의 문장 ······································ 197 이삭에 대한 詩 ································· 201
이 삭
14 이삭 정일근 초대시인 1958년 경남 진해 출생. 1984년 무크 『실천문학』으로 등단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시)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시조) 당선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외 다수. 소월시문학상, 영랑시문학상, 지훈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경남대학교 한국어문학과 초빙석좌교수. 遠願(원원) 신우대 아래의 잠
15 遠願(원원)* 경주 남산 외동읍 모화리 어디쯤 한 소녀가 걸어가고 있다 오지 마라, 오지 말라고 막아서는 명랑 법사의 문두루비법 같은 새벽안개를 헤치고 좁은 논두렁길을 총총 걸어 자신의 천년을 찾아가고 있다 봉(鳳)이 황(凰)을 따라 날아간 봉서산(鳳西山)을 향하여 한 소녀가 자신의 운명을 비단에 금니(金泥)로 새긴 약속으로 계동 맑은 물소리 앞장세워 찾아가는 원원이여, 먼 꿈이여 겪어보면 사랑이든 눈물이든 어린 날 해찰에 지나지 않는 일인데 어디쯤 푸른 바다로 가는 길이 이어지는지 멀고 먼 바람을 쪽빛 돛으로 펼쳐 언제쯤 서원의 바다를 다 건너갈 것인지 그 사이 절은 사라지고 절터만 남아 사람의 사랑이란 저 삼층 석탑 한 모서리 닳는 그 세월에도 가져다 재지 못하는 짧은 슬픔인 것을 모르고 한 소녀가 하모화 상모화 지나 새벽길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다.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에 있는 신라시대 절터.
16 이삭 신우대 아래의 잠 경주 남산 경주 남산 용장골 어디 어디나 처음 지나는 어느 어느 골에서 신우대 무성한 폐허를 지나면 그 아래 깊은 곳쯤 내 지나간 전생이나 돌아올 후생이 편안한 백골로 누워있을 것 같다 은하계 먼 별에서 여기 찾아온 외계인이 신우대 잎에 길게 누워 경주 남산이 들려주는 금강경을 따라 외는지 바람이 없는데 잎이 불경처럼 슬프게 흔들린다 생로병사가 만든 남산의 무덤들은 편안한가 이번 생을 살면서 얻은 것이 있다면 다 돌려줘야 편히 돌아갈 수 있는 사(死)의 길에 무덤이란 서역에서 온 낙타의 단봉 혹은 쌍봉 같은 것 그 혹 달고 미륵의 나라로 어찌 갈 것인가 신우대 아래 그 아래의 잠은 가진 것 다 돌려주고 가는 길 경주 남산이 가르치는 무소유의 길 다 버려야 홀가분한 편한 잠 그 길이와 너비에 나를 눕혀 본다
17 꼭 맞다, 내가 누워 있기에 신우대 무성한 골이 나는 좋다 말하자면 10문 7이다 뭐해, 당신도 어서 한 자리 잡고 누워.
18 이삭 배한봉 초대시인 경남 함안 출생 1998년 『현대시』 등단.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시집 육탁 , 주남지의 새들 , 우포늪 왁새 외 다수 저서 문명 위의 초록 , 한국 현대시의 생태학 당신과 나의 숨결 외 여럿. 현대시작품상, 소월시문학상, 풀꽃문학상, 박인환 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강의 말끝의 늪 토월천
19 말끝의 늪 어젯밤엔 뱀 꿈을 꾸어 마음이 뒤숭숭한 것 같아요. 커피를 마셔서 춘곤증이 달아난 것 같아요. 무슨 말이든 끝에 ‘같아요’가 붙는다. 그러지 말고 이렇게 말해봐, 물을 많이 마셔서 익사할 것 같다고. 그럼, 그것도 같아요를 쓸 수 있는 말이니까. 안주머니에 넣어둔 문장을 꺼내 천천히 읽으면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가 들려요. 같아요가 사라지니 햇볕 쬐는 기분이 들지? 테이블 위의 소금빵, 맛이 어때? 참 맛있는 것 같…, 아차! 맛있어요. 말의 얼굴엔 눈이 하날까, 둘일까. 말의 얼굴엔 입과 코가 있을까, 없을까. 말끝을 점령한, 같아요 귀신, 자기 말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같아요 늪, 덤불을 헤집고 나온 말끝을 돌아보며 우리는 웃는다.
20 이삭 토월천 외다리의 새들 나무 새순 돋고 꽃 피어서 햇빛 더 눈이 부신 한낮, 하천 복판에 물새가 외다리로 서 있다. 외다리로 중심 잡는 일은 날갯짓의 고통을 까무룩 잊어버린 지상의 몫이겠다. 나무에 연두의 물이 오르거나 말거나, 물길 옆 하상에 풀꽃들이 자지러지거나 말거나 물새들은 저 외다리로 삶은 송곳 끝 같다고, 송곳 끝 같은 중심 잡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고통과 고투는 혈족임을 나는 알고 있다. 야생의 방어기제가 된 외다리의 불안과 두려움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을 딛고 있는 가녀린 다리와 가슴에 바짝 붙인 한쪽 다리 사이에는 날아올랐다 다시 지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배려한 신의 눈물이 깃들었을 것이다.
21 한 벌 날개의 무게를 갖지 못하였으나 물새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보려고 나는 천변에서 오래 외다리로 서 있어 본다.
22 이삭 이광성 2025년 《시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이삭문학협회 회원, 이학박사 시집 『아벨 방정식을 푸는 세 가지 방법』 『내 옆에 길이 있어』(공저) 시인의 말 마셔도 마셔도 목이 마르다. 파도 파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번 생은 가도 가도 닿지 못할 것 같다. 레고 블록 하나 9층에서 멈춰 있다. 별거 왜가리는 외발로 읽는다 육박(肉薄) 아벨 방정식을 푸는 세 가지 방법 시간을 가불하다
23 별거 우리는 늘 어긋난다 서로를 찌르면서 함께 한 호흡 황톳길에 적는다 닿지 않는 차가움 바닥에 부서진다 데크길 따라 오선지에 걸린 이야기 마른 혀끝처럼 굳어간다 갈라진 입술 사이 네 이름이 걸려있다 황톳길 걷는 시화 버둥거리고 먼저 간 발자국 끝내 읽지 않는 길을 지운다 아직도 마르지 않는 바닥에서 민달팽이 걸어간다
24 이삭 왜가리는 외발로 읽는다 떠난 자리로 돌아온 왜가리 제 그림자를 읽는다 떠내려온 낯선 눈동자들 철망 마디마디 더듬고 끊어진 발소리가 돌아오지 않는다 시화에 새겨진 길 잃은 호흡 뜻 모를 얼굴로 박혀있다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 쌓인 침묵 속에 비린내 나는 검은 비닐이 떨어진다 아무도 읽지 않는 외발 왜가리가 쪼아대는 온천천
25 육박(肉薄) 창백한 거리가 미행합니다 바닥을 끌며 뒷덜미 낚아채는 차가움 뒤따라오는 외침은 수의를 입고 뒤집힌 낙엽처럼 부서집니다 파고드는 송곳 바람이 심장을 태우고 좀 먹은 우리들의 맹세가 차디찬 인디고를 잘랐습니다 닭 울기 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처럼 서로를 부정하는 악수는 뼈마디 꺾는 비웃음으로 쌓입니다 육박하는 새벽이 부풀어 오릅니다 터지지 못한 마디 하나씩 끊고 얼굴을 잃은 메두사가 깨진 보도블록 위에서 우리들의 함성을 오려냅니다
26 이삭 아벨 방정식을 푸는 세 가지 방법 1. 티베트 사람들은 말한다 숨을 마친 생명은 다시 태어나기 전까지 중간 상태에서 49일을 머물고 바람의 말이 알려주는 데로 먼 길을 떠난단다 풀리지 않는 방정식처럼 영혼은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2. 아침 출근길, 중앙분리선 너머 고라니 한 마리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누워 있다 비린내 나는 비명이 일상의 무심함을 깨운다 굳게 다문 선을 넘지 못한 채 하늘은 묵묵히 그 위를 지나간다 식어버린 어미의 발자국은 마지막 순간까지 숲속 새끼들을 맴돌았으리 한순간, 오색 깃발이 눈부신 빛으로 두 눈을 찌르고 어미는 바람의 말을 타고 숲 너머 어디론가 떠난다
27 청소차가 와서 고라니의 흔적을 쓸어간다 고라니는 울고 청소차는 웃는다 누군가의 끝, 누군가의 시작 해답 없는 문제처럼 삶과 죽음은 스쳐 지나간다 3. 어젯밤에 아버지 다녀가셨다는 어머니 말씀을 떠올리는 아침, 잘 모셔라, 죽었는데 살아있단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아벨 방정식의 해처럼 쉽게 풀리지 않는다 하루하루를 비루하게 꼬리를 흔드는 사람들도 바람의 말을 타고 불가능의 세계를 증명하러 간다 오면서 가는 이 길 위에 한 생명이 날아오른다 그리고 다시, 풀리지 않는 방정식이 남는다
28 이삭 시간을 가불하다 주말이 용두산을 오른다 자물쇠 입을 열고 손바닥을 맞춘다 함께 적은 말들이 읽히지 않는 채 식는다 달의 영혼을 당겨쓴 남자가 자물통에 갇혀 있다 CCTV는 눈을 감고
29 박원배 2025년 《시사사》 등단 뿔동인, 여울동인, 이삭문학협회 회원 시인의 말 월드컵 축구를 보다가 경기 내내 운동장 밖에서 몸을 푸는 선수를 보았다. 그는 끝내 경기에 투입되지 않았다. 나도 세상 밖에서 몸만 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꿈속에서, 내 새끼발가락에 마이너스 45도 각도로 빗맞아 골문 안으로 굴러 들어가는 시 한 편을 보았다. 관중들의 야유에 잠에서 깼다. 꿈이 아니었다. 얼어 죽은 사내를 위한 변명 남편을 묻고 하이힐을 신었다 물리적 도시 오르톨랑 부유하는 각도
30 이삭 얼어 죽은 사내를 위한 변명 네 생각이 나는 것을 보니 내가 아주 한가하거나 네가 멀리 떠나지는 못했나 보다 아직도 구글 맵에서 렉으로 걸려있거나 매년 건강검진을 하고 매번 의사는 엑스레이 차트를 들고 내게 묻지 가슴에 새겨진 멍을 지워줄까요? 그건 멍이 아니에요. 검은색 문자예요. 색깔이 좀 번졌을 뿐이에요. 멍은 나의 상형문자일까? 문자라고 우기면 마음이 읽힐까? 입 눈 코를 잃어버릴 것 같아 멍드는 온도는 몇 도일까? 멍드는 온도는 관심이 없어 멍들고 싶은 온도로만 살고 싶어 내 사랑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되었어. 환상통 같아서 아프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돼
31 냉동고에 갇혀 얼어 죽은 사내가 있어 냉동고는 고장이라 영상 18도였다고 해 그도 얼고 싶은 온도를 가졌을까?
32 이삭 남편을 묻고 하이힐을 신었다 반복되는 신화 새벽에 사라져 저녁에 부활하는 오르가즘을 감추고 태양과 어둠이 아직 서로를 모를 때 새벽에 태어나 저녁에 스스로를 죽이는 두 얼굴 모든 층을 벗고 일곱 개의 문을 통과하면서 나체가 되어 자기 그림자에 베여 일곱 토막이 된 그의 몸을 모아 관 속에 넣었다 관 위에 눕자 짧은 따뜻함이 골반을 건너와 부활과 죽음을 경계로 그림자를 섞었다 뱃속에서 이름 없는 신의 심장이 잠들지 못하고 뱃속에서 아이의 척추가 자라고 있다 아이의 척추로 빚은 굽이 뾰족한 하얀 구두 스틸레토, 자비의 단검, 부상당한 병사가 스스로 숨을 끊는 그가 내게 준 마지막 구두, 그의 단검 투닥 투닥 관 뚜껑에 못 박는 소리 또각 또각 이승과 저승의 중간에서 울리는 소리 죽은 자와 산 자의 숨소리
33 처음의 춤은 애도였다 하얀 구두를 신고 무덤 위에서 천천히 춤을 추었다 구두의 굽이 갈비뼈를 하나씩 밟으며 심장 조각 사이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심장은 잠시 꿈처럼 뛰었다가 다시 잠이 든다 그의 갈비뼈가 하늘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다음의 춤은 저주였다 춤을 출수록 발에서 오르가즘이 뼈처럼 자랐다 춤을 멈출 수가 없다 구두는 그가 흘린 피로 붉게 물들어 빨간빛의 신음을 낸다 신의 슬픔에서 만들어진 구두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구두 발목을 자르지 않고는 벗을 수 없는 구두 남편을 묻고 빨간 구두를 가슴에 안는 밤
34 이삭 물리적 도시 손톱에 돋은 까시래기를 가지고 놀다가 종로에 나가 술을 마셨다 청진동쯤에서 비가 그쳐 편의점 우산을 정류장에 걸어두고 한참을 지켜보다 돌아섰다 이 도시는 나를 보관하지 않기에 여기에서는 우산을 보관할 일이 없다 사연이 없는 골목길은 직선이거나 혹은 아니거나이다 생각할 것이 없기에 골목을 지나치는 시간은 언제나 물리적이다 종로3가 을지로 종각 모르지만 익숙한 표지판을 지나 어느 한정식집에서 알지만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난다 과장된 몸짓의 인사가 끝나면 나눌 말이 별로 없다
35 물리적인 속도로 술만 마신다 까시래기를 뜯은 손톱을 슬쩍 만져본다 따끔거린다 까시래기의 흔적을 만지며 혼자 논다
36 이삭 오르톨랑* 신이 눈을 감는 날, 끝이거나 시작이거나 새의 영혼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새의 눈알을 파낸 후 내 갈비뼈 속에 가두고 밤낮없이 심장을 파먹게 한 후 살집이 정확하게 두 배가 되면 스니프터 글라스에 담긴 36.5도의 내 혈액에 산채로 담근다 혈액이 새의 폐부에 천천히 스며들다 숨이 멎으면 털을 뽑고 순결한 나신에 한 방울의 금단만 떨어뜨린 후 체온에 천천히 구워 섣달그믐날 산 자에게 한 마리를, 죽을 자에게 두 마리를 미사포를 둘러쓰고 눈물을 흘리며 내 피의 달짝한 향기에 죄책감을 조미하여 새의 전 생애를 천천히 씹어 먹는다 달리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 밀교가 되어버린 오롯한 사랑
37 마지막 만찬으로 새 두 마리를 먹고 8일간을 굶다가 죽은 사내는 새의 사랑을 얻었을까 새의 영혼이 육화되어 내 갈비뼈를 펄럭이며 날아오른다 * 회색머리멧새를 이용한 프랑스 요리. 동물 학대 등의 이유로 법적으로 금지됨.
38 이삭 부유하는 각도 별빛은 빛의 끝. 부서진 영혼이 하얗게 타고 있는 자세. 다 타고 나면 눈이 되어 내린다. 하얀 눈은 소멸로 가는 마지막 유언. 유언에 애도를 더하면 땅 에 스며들어 영혼의 지문을 남기지. 공간 사이로 추 락하는 빛. 틈을 벌리면 공간이 될까. 나는 멈추어 서서, 자세를 세운다. 빌라 뒤편 먼지색 몽고간장 말통 옆, 도시가스 배관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면 목이 꺾인 새처럼 나선으로 떨어지는 이파리. 무너 지는 햇볕에 부유하는 지구가 보인다. 꿈꾸지 않는 잠은 죽음 같아서 이불을 밀어낸다. 죽음도, 꿈도 없는 하루가 시작된다. 빛 속에서 빛이 보이지 않는 하루. 공간을 밟고 선 그네가 바라보는 끝, 속도의 끄트머리에서 들려오는 정적. 줄을 끊어버리면 끝을 넘어갈 수 있을까. 오늘도 나는 나로부터 추락한다. 눈을 감으면 들려오는 바람의 비명, 나의 비명. 오 래된 껍데기 속 어린 영혼이 주먹을 휘두르듯 공간 을 내던지고 있다. 펄럭거리는 정적, 부유하는 것들 이 만든 각도. 이 밤, 지구가 머리 위로 오면 뒤집 힌 추락을 만날 수 있을까. 목이 꺾인 새의 눈에서 빛의 끝이 다시 날아오른다.
39 강지윤 2021년 《부산시단》 신인상으로 등단 (사)부산문인협회, 새부산시인협회, 이삭문학협회 회원 동의대학교 부동산대학원 석사과정 중 문현삼성공인중개사 대표 시인의 말 반백 년 넘게 품어온 삶의 결들이 이제야 시라는 투명한 꽃으로 피어납니다. 서툴지만 정성스레 일군 내 인생의 이모작, 텃밭을 가꾸듯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습니다. 이 작은 고백들이 당신의 계절에도 따스한 온기로 닿기를. 섬이 된 여자 강아지 하루 시점 사직 야구장에서 붕어를 낳는 여자 안부 전화
40 이삭 섬이 된 여자 말 실랑이 다음 날 아침밥은 시어머니 차지다 둥근 식탁에 가시 돋친 조기가 웅크리고 있다 삼겹살 사다 노랗게 구워 나 혼자 처묵는다 먹지 않은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다 ‘시어머니한테 항상 공손하고 말 한마디라도 부드럽게 해야 쓴다 잉’ 박힌 가시 빼내 주신 아부지 까마귀가 된 구순 어머니 매누리가 차려 준 밥상이 제일 맛나다며 석류로 벙그레 웃으신다 가시 없는 순살 고등어 밥이 꿀이다 시를 쓰면 쌀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시를 쓰면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난 섬이 된다
41 강아지 하루* 시점 경주 관성 솔밭 해수욕장 동해 수평선이 보낸 파도가 술래잡기하러 달려온다 일광욕하던 모래 밟으니 개뜨겁다 한여름 털옷이라니 개살려 숯불 위 춤추는 오징어 삼겹살 바닷가 텐트촌 밤이 익어간다 홀로 집 지킬 때는 개외롭고 함께 산책할 때 개신난다 엄마가 눈물 흘리면 개슬프고 간식 줄 때 개좋다 ‘강아지를 버리고 가지 마세요 제발!’ 백사장 현수막이 애원한다 사람들이 개나쁘다 개소리한다고? 사람들이 개소리한다 개는 나쁘지 않다 하루는 나쁘지 않다 * 정월 초하루 입양한 유기견 강아지
42 이삭 사직 야구장에서 선수들 등에 업고 야구장 가득 채운 발들 연패 행진에 애가 타 맥주 불러 앉힌다 닭 다리 잡은 응원석은 득음 중이다 지고 있는 롯데 질 수 없는 응원 ‘롯데가 이겨야 집구석이 조용하다’ 현수막도 파도를 탄다 공에 맞은 다리가 절룩거리며 일루를 걸어 나간다 마! 상대 팀을 향한 호통 안타를 외치는 부산갈매기들 판을 뒤집을 기세다 여전히 뒤처지고 있는 방망이들 이대로 지느냐 역전 홈런이냐 9회 말 투아웃 투 스트라이크 방망이 끝에 매달린 잠자리 같은 눈망울 절벽 끝에 선 공 딱!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오른 공 역전 홈런이닷 돛을 올린 돛단배 노를 젓고 비워진 맥주병, 휘파람을 분다
43 붕어를 낳는 여자 낙엽 위에 거주하는 아주머니가 있다 민원으로 이리저리 밀려나도 힘주어 붕어를 낳는다 붕어들은 나란히 앉아 지나가는 발을 낚아 졸고 있는 지어미를 깨운다 학원가는 아이 꼬리를 자르면 퇴근하는 아가씨 머리카락을 자르면 물살 헤치던 보따리를 풀까 공중에 풍경소리 들려줄까 기다란 동아줄이 저녁을 붙잡으면 아주머니 배는 동전으로 배불러지고 다시 붕어를 낳을 준비를 한다 멀리서 풍경소리가 울린다 붕어가 태어났다는
44 이삭 안부 전화 엄니, 시방 뭐하요 잉, 경로당에서 십 원짜리 고스톱 친다 오늘은 쬐까 운이 좋아 솔찬히 땄어야 수화기 너머 파도가 웃고 있다 초상 칠 때, 동네 외숙모 느그 엄니 전화 오면 화토친다 그러고 맨날 갯 바탕에서 바지락 팠어야 느그들 줄라고 냉장고에 바지락이 웃고 있다 엄니, 하늘에선 뭐하요 잉, 구름 타고 해외여행 댕기느라 재미지다야
45 김남숙 제9회 《동서커피문학상》 맥심상으로 등단 이삭문학협회 회원 시집 『나비가 되려면』 시인의 말 익숙한 길을 잃었습니다. 동아줄이 있나 살폈지만 안개 낀 벽이 먼저 만져지네요. 비로소 내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이고 이제부터 흘러가야겠죠. 소울메이트 쓸모 있는 기다림 여행 가방 출항 코끼리 다리 만지기
46 이삭 소울메이트 그때 따라 웃어줄걸. 눈부셨던 낮 동안의 주름이 석양에 숨고 싶으면 살진 달빛 속을 느리게 거닐었지. 얼굴만 봐도 웃음이 팝콘 되었던 순간들은 회색 신사*가 가져갔지만 까칠한 혓바늘을 잘 버텨온 서로의 심장을 격려하면서 세심한 푸념 지절대도 은자(隱者) 미소로 귀만 커져 있어 말 부스러기 흘리지 않는 사진집에 살고 있는 그대 어디였을까? 바람 나들이하는 유채꽃에 파묻혀 초승달 미소 짓고 있네. 그때 더 많이 웃어줄걸. *미하엘 엔데 ‘모모’에 나오는 시간 도둑
47 쓸모 있는 기다림 고독(孤獨) 대상이 필요했지요. 하지만 중심을 비울 수 있는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달팽이 걸음으로 사막을 지나느라 고단해진 꿈이 달아나지 않게 기다림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러다 주머니 속으로 숨어든 나비 온 세상 빛이 두근거렸지만 누가 볼까 달항아리에 넣어 두었습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알아주길 바랐지만 들킬까 두려운 시끄러운 고요가 어떻게 발화하는지 팽창할 수 없는 그늘에서 잠자던 나비가 시간이 지운 길 찾아 달뜬 나래짓 합니다.
48 이삭 여행 가방 불현듯 여행이라니요 요트 타고 세계 일주하고 싶다고 먼 바람 소리로 전해 들었지만 당신 홀로 떠나겠다니요 틀어진 마음을 부여잡고 간간이 건져 올리던 대화가 제법 뱃살이 올라 풍성했는데 한 마디 뚱기지도 않고 가겠다니요 미련이 서푼도 없는 날 같이 떠나자는 소망은 짐작도 할 수 없는 고통에 욕심 비늘 되어 떨어지고 툴툴댔던 그리움 남겨두고 향기로웠던 사랑 단단하게 개켜 여행 가방 빼곡히 담아 드립니다
49 출항 별 세다 햇잠 든 가로등 아래 비스듬한 골목에서 웅크린 어둠이 검은 체취 지우려고 부산한데 지문 오랜 신발 타고 새벽길 항해 나선다. 가로수에 매달려 있던 나뭇잎 소슬바람 뒤에 숨고 남겨진 커피 두 잔 구겨진 한 송이 약속 비극이 엎드려 있다. 외사랑인가? 그래도 고백할 용기는 있었잖아. 더께가 내려앉은 신발짝은 알겠지. 바람 뒤에 숨은 나뭇잎이었는지 상처가 두렵지 않은 장미였는지 거절될까 추스를 마음이 더 두려워 시도조차 안 하던 습관이 꿈틀거린다.
50 이삭 코끼리 다리 만지기 추위를 엮은 겨울바람 두르고 푸른 뱀이 기웃댄다는 밤바다를 거닙니다. 수다쟁이 바다에서 자맥질하던 파도가 너울 인사합니다. 어둠이 삼킨 사람들을 달빛이 게워내고 파도 소리와 대결하는 버스킹에 잠들지 못한 갈매기가 코러스를 하니 바위가 쉬지 않고 박수 쳐 줍니다. 일상이 자글거려 동굴로 숨고 싶거나 같이 울 나긋한 어깨가 필요할 때 바다 귀는 여러 개라고 나만의 코끼리 다리 만지며 입말 편지 주고받았는데 수다를 전파하러 다닐 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바다 입이 여러 개라 지뢰밭이 늘어나고 있다는 걸
51 강동환 2013년 《청옥문학》 수필 등단 이삭문학협회 회원, 천성문인협회 편집기자 알파데일리 양산 지국장, 양산 시민기자 소설 『오! 나의 변호사 아가씨』 전자책 수필 『천방지축 강동환 s양산라이프』 전자책 시집 『빛의 언어들』 시인의 말 늘 배우며 한 걸음씩 전진하여 한 줄의 글에 더 진심과 정성을 담고 작은 위로와 희망을 전하고 싶습니다. 배움은 나눔으로 더욱 깊어지고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을 품고자 합니다. 세상에 작은 빛을 보태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달래 아가씨 유월이 오면 숲 서운암 금낭화 청보리밭
52 이삭 달래 아가씨 연둣빛 돋는 텃밭에 호미 든 아가씨 허리 굽힐 때마다 길게 따라 올라오는 달래 뿌리 손끝에 묻어나는 흙냄새와 옷깃을 스쳐 가는 봄바람 한 줌 한 줌 바구니 가득 차면 들녘엔 환한 분홍빛
53 유월이 오면 꽃잎은 흩어져도 우리의 발자국은 남는 것 그날의 웃음소리가 초록 그늘에 고여 있다 우리가 지나온 자리마다 맺힌 아름다운 보람과 정과 온기와 땀방울 유월이 오면 들판엔 눈부시게 핀 우리의 웃음꽃을
54 이삭 숲 푸른 새벽이 숲의 문을 연다 이슬 머금은 풀잎마다 햇살이 내려앉고 바람은 조용히 나무의 어깨를 다독인다 낮은 자리에서도 세상을 향해 환하게 웃는 작은 들꽃 한 송이 새들은 가지 끝에 앉아 하늘을 노래하고 청보리밭 물결에 봄날이 뒤척인다 사람도 결국 한 그루 나무여서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푸른 새벽의 숲은 말이 없다
55 서운암 금낭화 복주머니 꽃잎마다 고이는 봄빛 줄지어 늘어선 천 개의 된장 항아리마다 발길 멈춘 햇살과 산길 따라가는 매화 향기 골담초 노란 꽃망울 등불 밝히고 이팝나무 물결 대신 하얀 그리움이 서는 자리 환하게 피어난 금낭화 서운암 봄을 지키고 있다
56 이삭 청보리밭 봄은 초록 물결 위에 한 줄 시처럼 일렁인다. 바람에 고개 숙인 보리 이삭들 기대며 살아가는 법을 알아 서로를 위무한다 통도사 범종 소리 울려 퍼질 때 꽃들은 저마다의 향기로 길을 열어준다 그 길 위에 서면 문학은 눈앞에 일렁이는 푸른 숨결 같은 것 내딛는 걸음마다 마음이 투명해진다 삶도 문학도 바람을 견디는 일 청보리밭 가에 서면 내 시도 일렁이며 자란다는 걸 안다
57 정현 장형순 월간 《한맥문학》 시 등단 부산문인협회, 불교문인협회, 기장문인협회 부산문학인협회, 이삭문학협회 회원 작품집 『시간을 건너온 시』 사화집 『보고 싶은 사람』 시인의 말 한 편의 시를 쓰는 일은 마음의 마당에 묵묵히 나무를 심는 일과 같습니다. 거친 바람 속에서도 기어이 잎을 튀워낸 우리들의 언어가 당신의 삶에 작은 그늘이 되기를. 고맙습니다. 황학대에 홀로 앉아 기장 아난티의 아침 창립 30주년 기념식 마치고 방문간호 H-가족 드림 9월 인생 강연
58 이삭 황학대에 홀로 앉아 오월의 맑은 햇살 푸른 그늘 우거진데 외로운 대에 홀로 앉아 옛 자취를 생각하네. 솔바람은 솔솔 불고 숨은 새는 지저귀는데 죽성벌 파도 소리 달빛 시내와 어우러지네. 외로운 산하의 육 년 유배 한이 남은 이곳에서 정철과 박인로 가인들의 발자취 여전히 또렷하구나. 세상일 모두 내려놓으니 마음 절로 아득해져 바쁜 중 얻은 참된 즐거움 바로 이 언덕에 있네.
59 기장 아난티의 아침 이른 아침 여유로운 발걸음 기장의 명소 아난티에 닿으니 준비해 온 조식 거리 디저트 카페 야외 의자에 앉아 탁 트인 바다 향해 마음을 풀어 놓다 바람이 건네는 파도 소리 여름새 (호반새)의 울음이 길을 열어 주고 오시리아 해안 산책로 따라 걷노라면 확 트인 수평선 내 안의 막힘도 시원히 열려간다 절벽 끝 오랑대에 서면 용왕단 사찰 앞 삼배의 예로 마음을 씻고 깊은 푸른빛 속에 나를 맡긴다. 오늘 아침은 바다와 함께 드린 기도 자유와 감사의 이름이었다.
60 이삭 창립 30주년 기념식 마치고 낯선 무대 위 작품 한 줄 한 줄 마음을 실어 마주한 숨결들 속에 내 떨림도 조용히 내려앉고, 다채로웠던 문학의 결, 그 빛나는 순간들이 한 편의 시처럼 마음에 남아 아쉬움 끌어안고 돌아가는 길, 문득 멈춘 조용한 카페 주차장 마감 15분 전, 서둘러 받은 테이크아웃 커피 한 잔 늦여름 밤, 차창 너머 잔잔한 바람과 함께 마시는 그 온기 작가님과 마주 앉은 짧고도 깊은 휴식 같은 시간 말보다 많은 마음이 오가는 조용한 차 안, 오늘 하루의 긴장도 천천히 커피 향에 녹아내리고 문학으로 물든 하루의 끝자락에서 한 모금의 위로가 되어 심장은 다시 고요히 시를 읊는다.
61 방문간호 고독과 무력이 깃든 노인의 고백 힘든 이별 떠나는 인연 쓸쓸함 속에 스며드는 고뇌 시간의 흐름에 스러지는 마음 끝이 다가온다는 인식 그로부터 피할 길은 없다 마주할 고통과 이별의 아픔 그것이 우리의 운명 그리움과 아픔으로 가득 찬 이별의 순간을 기억하며 잊을 수 없는 그 사랑을 영원토록 간직하리라
62 이삭 H-가족 드림 9월 인생 강연 작은 손 붙잡고 뒤뚱뒤뚱 걷던 아이 이제는 든든한 어깨로 부모의 노년을 지켜주는 기둥이 되었다 오늘 회사의 따뜻한 초대 속에 『저속 노화 마인드셋』 강연장을 메운 네 모습은 한 가정의 아들이자 세상의 귀한 일꾼으로 빛났다 나의 뿌듯함은 네가 잘 자라준 사실만으로 충분한데 이제는 부모의 건강을 먼저 걱정하는 네 마음 씀씀이에 눈시울이 젖는다 아들아 네가 걸어온 길이 부모의 보람이듯 앞으로 걷는 길은 너 자신의 꿈과 행복으로 환히 빛나기를
63 오늘 이 순간 가족과 회사 그리고 너를 통해 내 인생이 더 젊어지고 더 깊은 감동으로 채웠다
64 이삭 조임경 2021년 《문화와 문학타임》 신인상 등단 이삭문학협회 회원 시집 『빛의 언어들』 (공저) 시인의 말 서두르지 않는 마음으로 삶의 쉼표 같은 위로를 적고 싶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망명 마중 생각의 틈 비 오는 날
65 살아간다는 것은 길을 걷다가 문득 흙냄새에 젖은 바람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 누군가 지나간 자리마다 풀잎이 몸을 일으키고 이름보다 오래된 땅이 묵묵히 기억하는 지나간 시간의 숨결 살아간다는 것은 견디는 일 그리고 다시 피어나는 일임을 그렇게 남겨진 발자국 위로 다른 발걸음이 화석처럼 쌓여 내 삶이 더 단단해지는 것이다
66 이삭 망명 낯선 곳을 지우고 나를 채우니 도시가 휘발된 자리에 산이 들어서고 구름은 파란색을 간간이 떼어낸다 타인이 버리고 간 풍경의 사체 위에 눈자국을 찍으니 애증이 몰려오는 자유를 목격한다 이유가 된 이름을 떠올리고 지우다가 내가 찾은 투명한 자리에 앉아 서로가 서로에게 이끌려 미지의 심해가 되는 시간 보이지 않는 소음이 터널 속으로 들어와 무거운 침묵의 골조 사이를 횡단하고 있다. 반복되는 일상을 버리고 영혼의 망명을 허하라.
67 마중 먼 길을 돌아 서로의 계절을 놓쳐버린 사람들은 가끔 기억 속에서 다시 만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젖은 골목 끝에 서 있거나 한때의 웃음 같은 바람으로 지나가면서 시간은 자꾸 앞으로 흐르는데 마음은 오래된 어느 날의 그림자에 붙들린 채 아직도 그 시절 언저리를 맴돈다 다 잊었다고 생각한 날에도 문득 낯익은 뒷모습 하나에 심장이 먼저 지난 이별의 이름을 불러내고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마음 한 조각쯤은 오래된 골목 모퉁이에 남겨둔 채 살아간다 서로를 기다리며 오래 머문 시간 오늘도 저녁노을을 지나가는 길에 서 있다
68 이삭 생각의 틈 아무런 생각 없음으로 아무것도 떠오를 것 같지 않지만 이것이다 작정한 순간 더 이상의 진전 없는 생각만 가득하다 실바람 부는 틈 사이 손 닿을 것 같은 하늘은 나를 현기증 나게 바라보다가 그림자처럼 따라와 구름 그늘을 만들고 다시 분주해진다 생각들은 꼬리를 물고 나와 달리기를 시작한다 긴 바램 사이 정처 없는 내 마음에 쉼표 하나 던져 놓았다
69 봄비 오는 날 밤새 내린 비가 분홍빛 파동을 유기하고 떠났다 창문이라는 투명한 절벽 너머로 내 시선이 수거해 온 낙화의 문장들 빗물은 길을 잃은 지문처럼 미끄러지고 꽃잎으로 분장한 허공은 잠시 봄의 무게를 견디는 중이다 나는 이 범람하는 봄을 떼어내려다 가는 시간의 주소를 찾지 못해 그 자리에 덧칠된 우표이다 가슴팍에 붙어 앉은 소음이 풍경을 인화하는 초점처럼 집요하고 나는 그 불협화음에 맞춰 리듬을 탄다 비 오는 날 아침 흩어지는 봄의 파편들이 내 마음에 서성이는 온기를 불러낸다
70 이삭 오영배 2023년 《문화와 문학타임》 신인상 등단 새부산시인협회, 이삭문학협회 회원 시인의 말 집안의 모든 창을 열고 공기를 비웠다 혹시 내 안에 상념도 같이 나가길 바라며 나가라 나가라 훠이 훠이~~~ 외 살림꽃 고장 사라진 현재 어떤 점심 고백
71 외 살림꽃 텔레비전 불빛 아래 홀로 비워낸 찬밥 한 덩이 장판 무늬를 작은 손가락으로 따라 그리다 졸음으로 빈자리를 덮은 저녁 놀이터를 서성일 때 등 뒤로 쏟아지는 무거운 눈빛과 속삭임은 운동화 앞코를 툭툭 치고 지나가고 골목 안 그림자들이 귀가를 재촉한다 기다림 소리에 달려간 현관 밤공기와 같이 온 엄마는 어린 뺨을 감싸안고 당신 품에 넣었다 이불깃은 마른 손가락으로 정돈되고 창틈으로 스며든 고달픔은 골목 그림자가 훔쳐 갔다.
72 이삭 고장 고장이 집을 방문했나요 고장은 공구를 요구하진 않나요 드라이버와 전동 드릴, 가위 혹은 작은 나사못까지 고장은 오면서 선물은 아니래도 공구 정도는 가지고 오면 안 되나요 그 참 난감하게 고장은 다양하고 다채롭네요. 끊어지고 깨지고 접불나고 천불도 나네요 고장은 언제 가시나요? 갑자기 오면 먼지와 같이 가시나요 완벽은 고장하고 친하나요 새것을 선물하면 좋은데 가끔 오는 것도 나쁘진 않네요 혼자 있는 시간도 많은데
73 사라진 현재 난간이 해를 피해 강 쪽으로 다리를 내리는 날 그늘막 하나가 찾아왔다 잠자리는 그늘막에 앉아 세수도 하고 식사도 한다. 잔잎들이 친구같이 모여 그늘을 드리우고 혹시 해가 찾아올까 자꾸만 곁눈질을 한다 물방울이 잎새를 먹일 때 사랑꾼은 부끄러움을 떨구고 물방울을 품었다 노부부의 잔소리가 그늘막을 채우고 레미콘 실은 차가 강을 점령할 때 잎을 늘어뜨린 가지는 귀찮은 듯 돌아앉았다 콘크리트가 그늘막을 먹었다
74 이삭 어떤 점심 말쑥하게 차려입은 흰 셔츠 다친 물결 한 점 없는 온천천을 뒷걸음질로 내딛는 점잖은 이웃집 어른 수면 아래 감춰진 앙상한 두 발 흙탕을 헤집으며 쉴 새 없이 바쁘다 발강이가 스쳐 가면 변한 눈빛 비릿하게 번뜩이고 숨겨 둔 날카로운 부리가 물살을 내려친다 파닥거리는 생살을 날것으로 넘긴 후 다시 목을 길게 빼고 헛기침을 한다 깃털에 튄 물방울을 털어내며 봄바람을 타는 여유 눈부신 흰옷으로 감추는 식사는 삶일까 죽음일까
75 고백 놈이 내 안에 산다 낮 동안 그는 나의 친절 뒤에 숨어 숨을 죽이고 내가 타인에게 따뜻한 악수를 할 때 소매 끝에서 차가운 눈으로 세상을 잰다 내가 공평을 말할 때 놈은 마음의 뒷문을 열어 제 몫을 챙길 주머니를 만지고 볕바른 길 위에서 나는 어질고 투명한 척하지만 어둠이 내리면 그는 나의 주인이 된다 낮에 뱉지 못한 비겁한 말들이 그의 입을 통해 검은 꽃으로 피어나고 혹시 몰랐던 시샘과 욕망이 그의 손끝에서 빚어진다 욕망이 가득한 그놈 친절로 가린 그놈 어느 놈이 나일까
76 이삭 송창희 2023년 《월간 문학공간》 시 부문 등단 양산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이삭문학협회 회원 시인의 말 한 알의 씨앗이 이삭이 되기까지 바람은 그렇게 불고 나도 그렇게 걸어왔나 보다 걷다가 걷다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깨진 신호등 무더위 별 이야기 상처 입은 그대에게 해안선에서
77 깨진 신호등 쨍 날카로운 소리 얼마나 놀랐을까 작은 가슴 부여잡고 얼마나 아팠을까 이 악물고 굳어지며 얼마나 무서웠을까 흘러내린 눈물 꽃 얼마나 슬펐을까 희미한 불빛 꺼져가고 얼마나 어두웠을까 지독하게 고독한 시간 얼마나 외로웠을까 깨진 신호등이 천천히 빠르게 눈을 감았다
78 이삭 무더위 1. 내 유년의 그날은 오늘처럼 더웠다 방학이 시작되자 베짱이 놀이로 선풍기만 때려잡았다 아직도 호랭이 같은 아버지 동살 잡히고 막걸리 삼매경이던 호랭이는 빈둥빈둥 베짱이가 못마땅했고, 나도 그랬다 그날, 첫 경험처럼 호랭이의 콧등을 건드리고 말았다 아담한 집 몇 채 어우러진 시골 마을 대나무 울타리만큼 예쁜, 우물 둘레길 둘레길로 냅다 토끼처럼 토꼈다. 잡히면 죽는다 먹이를 향해 죽일 듯이 가까운 어르릉 소리 오늘처럼 쪄 죽일 듯 무더운 그날 토끼는 긴 면벽수행에 들었다 그날 이후, 긴 세월 폭염이라 떠들어대도 그렇게 무덥지 않았다
79 2. 찜질 정글 헤치고 돌아온 어느 토요일 정오 거실은 석빙고처럼 고요하고 차갑다 매미인 양 이불을 둘둘 말고 있는 큰 베짱이 한 마리 껍질을 벗은 매미 한 시절 목숨 걸며 살아내는 것은 아름답다 껍질 벗고 매미처럼 뜨겁게 살아보지 않겠니 베짱이에게 용기 내어 말했다 이맛살 찌푸리며 돌아온 한마디 신경 끄셔도 됩니다 많은 세월 더위 잊고 살아왔는데 석빙고 안에 불더위 열기가 확 몰려왔다
80 이삭 별 이야기 별별 잡담을 하다 하다 별의별 이야기를 만났다 별 볼일도 없는 사람 따라다니다 별별 일을 당해 보았다 별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별점 난리를 구경하다 별 풍선을 다 터뜨렸다 별똥 같은 세상이다 별난 세상이다 별빛 흐릿한 하늘에 별처럼 그림 부르고 싶다 별처럼 노래 그리고 싶다 별이 될 사람 찾고 싶다 별에 사는 그대 찾고 싶다 아, 별이 아프다 나의 별이
81 상처 입은 그대에게 계절이 지나가는 소리에 살며시 눈을 뜬다 가을 잎사귀 떨어지고 다시 봄이 오기를 기다리겠지 세월이 몇 겁을 지나 바다도 마르고 하늘의 별도 스러져 가는데 응어리진 심연은 무덤덤한 자화상을 그린다 아주 가끔 저 깊고 깊은 곳 아직 감추지 못한 슬픔 터져 나올 땐 빗물이 되고 안개가 되고 먼지가 된다 그러나 그대 보지 않았는가 시간이 그대 삶을 다듬어 가는 것을 시간이 그대를 용서했다면 이제 스스로를 용서하기를 앙상한 가지에도 바람은 불어오고 깊은 심연에도 빛은 스며든다
82 이삭 해안선에서 여인의 굴곡 같은 해안선을 지난다 고운 금모래 사이 백골이 된 소라 하나 파도를 기다리던 질긴 눈물자국 하얗게 박혀 누워있다 무수히 손을 내밀어 잡을 듯 잡을 수 없었던 속삭임 속삭이는 파도에 몸을 실어 어머니 젖가슴 같은 해안선 넘을 수 있다면 일어나자 돌아가자 구겨진 신발 탈탈 털고 생채기 난 하얀 모래가 울고 있다
83 하부광 2023년 《문심》 시 부문 등단 한국사진작가협회 정회원. 부산문학인협회 이사 새부산시인협회, 영호남문인협회, 이삭문학협회 회원 한국문학신문 사장상 및 각종 사진전에서 다수 수상 시인의 말 시를 쓰는 일은 마음의 작은 불빛을 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짧은 문장 속에서도 오래 머무는 감정을 담으려 합니다 독자들에게 잠시 쉬어가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낙엽 너를 보내던 날 다대포의 갯벌 온천천 종이컵
84 이삭 낙엽 바람이 스치고 간 자리 천천히 떨어지는 낙엽 서늘한 공기 속에서 마지막 춤을 추듯 가볍게 그러나 힘겹게 내려앉는다 누군가의 추억을 닮은 듯 발 아래서 바스락이며 지난 계절의 이야기를 속삭인다 한때는 하늘을 덮던 푸른 날 햇살을 품고 흔들리던 순간들 이제는 땅 위에 누워 다시 흙이 될 준비를 한다 쓸쓸함은 지나가는 바람일 뿐 낙엽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며 조용히 미소 짓는다 내 마음도 낙엽처럼 또 다른 새벽을 기다린다
85 너를 보내던 날 한 걸음 한 걸음 떨리며 너를 보냈던 그날이 마음속 깊이 새겨졌어 그때 너의 미소와 따스한 햇살 그리고 이젠 보이지 않은 너의 뒷모습 마음속 깊은 곳에 살아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생생한 그날 그 순간 그 기억 하지만 추억은 영원하니까 내 마음속에 살아 숨 쉬며 항상 너를 기억할게 너를 사랑할게...
86 이삭 다대포의 갯벌 물 빠진 자리마다 그리움이 고여 있는 다대포의 갯벌 위에 조용히 마음을 놓는다 희미한 발자국 따라 떠난 이의 그림자만 길게 남고 붉은 노을은 끝내 그의 얼굴을 닮아간다 살며시 밟히는 모래 결 사이로 차마 삼키지 못한 말들이 작은 물길 되어 스며나고 갈매기 울음마저 저민다 함께 걷던 두 발자국 지금은 하나로 이어지고 파도는 아무 말 없이 그날의 대답을 감추고 돌아선다
87 온천천 부산의 품을 안고 흐르는 물길 햇살을 머금고 반짝이는 물결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시간을 품어 흐른다 봄이면 벚꽃이 길을 수놓고 여름이면 초록이 춤을 추고 가을이면 단풍이 노래하고 겨울이면 바람이 속삭인다 산책하는 이들의 웃음소리 자전거 바퀴가 그리는 선율 모두가 머물다 가는 곳 온천천 그리움이 스며있는 물길
88 이삭 종이컵 하얀 살 비워낸 채 누군가의 손에 들려 따뜻함을 담기도 하고 차가움을 안기도 한다 입술이 닿았다가 멀어지고 손끝에 머물다 버려지는 짧은 인연 덧없는 순간 흔적 없이 사라지는 이름 비울수록 가벼워지고 버릴수록 구겨지는 삶 한번 쓰이고 잊혀질 운명도 누군가의 온기를 품는다
89 정창래 2023년 《문화와 문학타임》 신인상 등단 시 낭송가, 이삭문학협회 회원 시집 『빛의 언어들』 시인의 말 시 속에서 철들어 간다. 다행이다 해 떨어지기 전에 철들 수 있어서 색경(色鏡)은 거울 되어 오월 꽁치는 불효였다 인생길 꿈
90 이삭 색경(色鏡)은 거울 되어 댕기 십팔 세 색경(色鏡) 속 수줍은 앵두 입술 중매쟁이 문턱 달아 숫처녀 향기 붉은 장미 피어나 연지 곤지 족두리 슬피 울어 저고리 옷고름 시집살이 맵다 맵다 눈물까지 맵더라 예쁜 얼굴 세월 뒤에 숨었나 열여덟 댕기 색경 어디에 있길래 염치없는 주름 동동 구루무 고개 저어 거울은 슬피 울어 열여덟 댕기 앵두 입술 손 색경 영영 못 찾고 거울이 되는구나 안쓰러워 날아와 거울 얼굴에 암탉 노란 알 품어 주네
91 오월 허리 펴 보니 보쌈해 간 내 삶 초승달 세월 들쳐 본들 노을 넘보는데 스쳐 간 비바람 먹구름처럼 켜켜이 쌓였건만 귓속말 청보리 오월 속에 있고 싶다 구름 타는 그네 댕기 치마 제비 날아 풍경 속 청춘 혈기 불꽃 피어 보려나 향기를 발산하는 신록은 내 품속에 안겨 있고 마음은 옛 시절 청보리 말해다오 세월 품은 초승달 산수(傘壽)는 모란의 붉은 입술 훔친다
92 이삭 꽁치는 불효였다 입맛 다신다 연탄불 꽁치 굽는 냄새에 넋을 잃고 접시는 발랑 누워 꽁치를 얌전히 받아 안는다 밥상에 둘러앉은 젓가락들 코끝이 벌렁거리고 거친 어머니 손은 뜨거운 꽁치를 맨손으로 해체한다 대가리, 꼬리, 뼈다귀 바다에서의 몫은 우리 셋이 다 했는데 배급받듯 앉은 젓가락들 접시 위에 꽁치는 이별을 고하고 엄마 손에 들린 대가리 어금니에 무참히 부서지고 꼬리와 뼈다귀 씹으시며 젓가락들 앞에선 맛난 척하시고
93 엄마가 발라준 꽁치를 맛나게 먹던 젓가락들 먼 훗날 젓가락들 꽁치 대가리 어금니로 씹어보니 목젖 달달 떨며 끝내 죄송함에 엉엉 울음 터져 꽁치 대가리는 불효였네 제사상에 영광 굴비 촛대에 촛불은 춤을 춰
94 이삭 인생길 젊은이 늙어 보았나 늙은이는 한때 젊어 보았네 젊었을 때 마음은 모든 것이 내 것 같았네 인생길 걷다 보니 어느새 노을이여 왜 이리들 법석들인지 늙고 싶어 늙었겠나 모진 풍파 겪다 보니 세월 흘러 늙었거늘 귀찮다들 하지 마라 인생길 만만치 않더라 정작 그 길 끝에 서 보면 늙어 갈 즈음 그때서야 무릎 칠 거다
95 꿈 꿈들 잠시 묻어 두었다 너무 오랜 세월 노을 속에서 찾았다 꿈꾸었던 꿈들 그 잠시가 너무 긴 세월 황혼이 되었네 희망에 부풀었던 꿈 찾아보니 어느새 백발이 되었네 무엇이 희망찬 꿈들을 그토록 무참히 짓밟아 버렸나 그때 그 환경들이 꿈들을 산산이 쪼개 부수었지 이제 그 꿈들은 이룰 수 없는 황혼 앞에 와 있으나 그래도 열정은 아직도 뜨거운 마음에 산수(傘壽)는 응원한다 세월에 어울리는 꿈을 찾아 마음에 품어 온 봉사의 길을 걷자 끝자락 어느 꿈보다 아름답고 보람 있는 꿈을 성취하리라
96 이삭 여승익 시인, 수필가 곰솔문학회 회장, 부산PEN 이사, 울산불교문인협회 운영이사 국제PEN 한국본부, 남항문학회, 이삭문학협회 회원 시인의 말 하지가 지났다. 이제부터 동지까지는 낮 시간이 계속 짧아질 일만 남았다. 우리 삶도 그렇다. 좋은 일이 생기면 계속 그렇게 살아갈 힘을 발견한다. 허무한 휴일 마주 보기 반가운 소식 기다림 소식(消息)
97 허무한 휴일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몸을 움직이는 대가로 마련하는 삶의 여비에 묶여 산다 이른 아침부터 해가 떨어진 저녁까지 파김치처럼 늘어진 몸 겨우 일으켜 세우며 시간을 밝히고 있다 오늘은 첫날이라 힘차게 내일은 하루 지났으니 더욱 세차게 일주일은 살을 태우며 지나고 있다 금요일 저녁 퇴근길 녹초가 된 몸으로 동료들과 한 잔 토요일 예정된 일정을 마치니 더더욱 파김치가 된다 일요일 아침 태풍이 지나간 뒤처럼 후줄근한 몸은 늘어진 채 방바닥에 뉘어 놓았다
98 이삭 마주 보기 바람이 긴 머리칼을 흔든다 늘 앞서가는 뒤만 보다가 카페 의자에 앉아 어색하게 마주 보며 앉았다 주위는 젊은이들이 재잘재잘 커피와 빵을 번갈아 먹으면서 행복한 얼굴 펴기를 하고 있다 앞에 마주한 마누라 별말 없이 휴대전화기에 빠져들고 앞에 앉아서 써치 라이트 시선을 하고 있다 늘 앞서거나 뒤따라가거나 혹은 옆을 지켰는데 오늘은 아직도 어색하게 얼굴을 자세히 관찰한다 바람이 아직도 머리칼을 말리고 있다
99 반가운 소식 지난 시절 백수 생활하는 때 넓은 가슴으로 안아준 동기 늘 고마운 마음을 담고 살아간다 어제 퇴근길에 갑작스러운 연락은 운전 중 놓아둔 전화기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소식을 전해준다 수영 양곱창 골목으로 올 수 있냐는 물음에 당연히 가고마 하고선 목적지로 차를 선회하여 막힘없는 도로를 따라 금방 마주했다 늘 변함없이 부드러운 얼굴 어제도 여전한 모습에 대작하는 시간 따뜻한 미소로 오랜만에 본 동무를 반겨준다 두꺼운 옷을 던지고 얇은 옷이 어울리는 때 반가운 동무와 함께 한 시간이 행복으로 꾸며졌다
100 이삭 기다림 아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작은 사랑에서 아이 키우는 큰 사랑으로 한 움큼씩 커져간다 매서운 바람이 제자리를 지킬 때 홑 옷가지로는 겨울바람을 이겨내기는 한여름 얼음 녹는 길이 된다 매화, 개나리, 목련, 벚꽃으로 이어지는 시간에서 한겨울 아득한 추위를 견뎌낼 기운을 갖는다 이루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힘겨운 시간을 견디는 디딤돌이 되어 찬란한 봄날 활짝 피우는 꽃 세상을 마주한다
101 소식(消息)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언뜻언뜻 떠오르는 무심코 내다본 창밖으로 그 사람이 찾아든다 젊은 날의 아련한 시간들 속에서 누군가 떠오르는 그 사람은 지워질 수 없는 시간을 함께했던 필름이 되었다 지나간 모든 시간을 추억이라고 하지 않는다 소리 없이 나의 기억 속에 된서리처럼 각인된 그 사람이기에 지금 아무것도 없는 시간에서도 조용히 다가온다 그 사람 이름은 잊히지 않은 동판에 새겨진 이름과 얼굴이 되어 시간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며 함께 살고 있다
102 이삭 우수경 2024년 계간 《청옥문학》 신인상 등단 시낭송예술지도사, 이삭문학협회 회원 제8회 청옥 전국시낭송대회 대상 수상(2025) 시집 『내 옆에 길이 있어』(공저) 「시인의 말」 바닷가에서 조약돌 하나를 주웠습니다 햇살 먹은 작은 돌이 내내 주머니 안에서 나를 데웠습니다 시어 하나, 문장 하나가 그렇게 놓이기를… 오래도록 그 온기를 기억하겠습니다 저녁의 솔기 식어가는 방 반쪽 신호등 무대의 변주 수난시대
103 저녁의 솔기 하행선, 창밖 능선을 베낀다 마른 산 어깨를 휘감듯 달이 산을 구르고 있다 어스름 기운에 졸고 있는 가로등 너머 산등성이에 기대었다 떠나는 열기구처럼 묵직한 공중을 건너고 있다 터널 속 어둠의 마디를 꿰매듯 차창에 업혀, 해진 저녁의 틈새를 깁는다 드문드문 뒤척이는 하루의 뒷모습이 아무리 조급해도 달은 한 번도 서두른 적 없다 버스는 내일의 입구를 향해 밤을 긁으며 별안간 추월선을 넘는다 생의 한 대목을 앞질러 가듯이
104 이삭 식어가는 방 오늘도 비집고 들어온다 어두운 바닥에서 하나의 이름으로 포개지는 타인들을 빤히 쳐다본다 읽히지 못한 모서리가 위벽을 긋고 역류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나의 주인은 사라졌다 벼랑 끝 붙박힌 이유를 모른 채 날마다 눈을 뜬다 답을 기다리는 눈빛들이 있는 한 내부는 공실일 수 없다 이따금 찾아오는, 홀가분한 진공 그땐 이름표가 바뀔지도, 녹슨 입술을 닫아걸지도 모른다
105 어떤 기척도 닿지 않는 아침은 누구에게 더 반가운 걸까 입만 벌린 나는 궁금한 채로 비를 맞는다 핏기 없이 굳어가는 이름들 누군가의 지문 속 붉은 맥박이 되려는 것일까
106 이삭 반쪽 신호등 사거리 한 모퉁이 흰 장갑 하나, 내려진 차단기처럼 흔들리는 호흡의 깃발 툭 던져진 인사말, 재잘대는 어린잎들 너머 더딘 혀에 머문 시선들 눈빛에 붙들린 반쪽이 입술 끝을 맴돌다 마른침 뚫고 터진 첫마디 달궈진 얼굴 달려가는 걸음마다 제 몫의 초록을 건넨다 신호가 바뀐다, 또
107 무대의 변주 외투를 벗자 집 떠난 새처럼 깡마른 어깨 위를 난다 골바람의 등에 업혀 사라진 무대 바스러지기 전 연한 잎에 촘촘히 박힌 깨씨무늬 반점처럼 남겨진 초록 위로 당당한 나비가 된다 읽다 만 책 속에 막 내린 무대를 눕힌다 가을 발린 마음까지도
108 이삭 수난시대 동지를 알리는 뉴스를 들으며 막 받은 수돗물로 물갈이를 한다 투박한 장독 뚜껑 속 여남은 마리 물고기들 탁한 조형 잎 사이로 기척을 지운다 뜰채로 옮기자 지진을 만난 듯 퍼득이는 몸짓 생의 배려는 야속한 폭력 붉은 꼬리로 유혹하던 수컷이 차가운 물에 날벼락을 맞는다 줄줄이 기절 밥풀만 한 몸이 떠오른다 잠시 후, 큰 놈부터 사부작대며 하나씩, 하나씩 꼬리치는 붉은 빛 식탁 위, 식어가는 팥죽의 붉은 테 가만히 저어본다
109 이상미 시인 이삭문학협회 회원 시인의 말 내 편이 있다는 건 나의 연약한 부분을 보여줘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것. 내 편…. 이삭문학협회 문우님들. 기도 환갑 생일상 동백섬을 걷다 아침묵상 해운대 요기니들
110 이삭 기도 아침마다 소나무 향기에 잠이 깨 창문을 열고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도 솔잎처럼 예리한 지혜와 푸른 향기로 나의 생활이 감사하기를 이 감사함이 변함없기를 찬물에 세수하다 말고 비누향기 속에 풀리는 나의 아침이기에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도 은유하게 녹아서 향기에 묻히기를
111 환갑 생일상 여든다섯의 어머니가 딸내미 환갑 생일상을 차리고 있다 오늘은 어머니가 딸 생일상을 차리는 날이다 기운 없고 느린 손길이지만 어머니는 딸이 태어난 날 직접 끓였던 그 미역국 맛을 오늘은 딸에게 맛보게 하는 날이다 세월이 어머니와 딸을 데려가고 있지만 시간은 흐르고 세월은 흘렀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조금도 늙지 않았다 생일상 앞에 앉은 딸은 말이 없다. 조용히 젓가락을 들지만 숟가락 위로 눈물이 고인다 어머니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큰 상일지도 몰라 나이 들지 않는 사랑 표현에 딸은 먹먹해만 하고 있다
112 이삭 동백섬을 걷다 저녁 불빛과 바람이 먼저 나를 알아본다 한 줄기 바람에 마음이 평온해진다 파도는 멀리서 말을 걸어오고 나는 발걸음으로 응답한다 파도의 리듬에 맞춰 생각들이 천천히 정돈된다 나뭇잎 사이로 스미는 달빛들이 내 어깨를 다독인다 괜찮다고... 그냥 걸으면 된다고 이 길의 끝엔 그 누구도 기다리지 않지만 이 고요가, 이 바다가, 오늘은 내 전부가 된다. 오늘 하루도 감사함으로 마무리를 한다
113 아침묵상 오늘도 독수리 같은 새 힘이 공급되어져 피곤치 않게 해주시고 편안함과 평정심 유지되며, 지혜와 총명함이 발휘되어, 모든 일에 명확한 판단력으로 부정적인 상황이 발생되지 않도록 지켜 보호되며, 심장 뛰는 순간순간 발 내딛는 순간순간 머리털 끝 하나라도 상함 없이 보호해 주길 아침 묵상으로 시작해 봅니다. 오늘도 파이팅요~
114 이삭 해운대 요기니들 사랑하는 요기니들은 매일 아침 잘 잤는지를 호흡으로 하루 시작한다는 것 마음 씀씀이를 받는 것보다 주는 것으로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 짧고 깊게 스쳐가는 인연 중에서 우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존재감으로 다가서고 있다는 것 사랑하는 요기니들은 그저 그런 하루에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고 섬세한 몸짓만 할 뿐인데 세상의 모든 것에 생활 속의 모든 것에 깊은 의미로 스며들었다는 것
115 노승희 2020년 《한양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이삭문학협회 회원 시인의 말 사람의 마음은 강해지기도 약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침묵의 시간을 견디며 홀로서기를 해야 합니다. 오랜만에 습작을 했습니다. 침묵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묵혀두었던 기록을 회수해서 시를 적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 입니다. 완성된 시를 읽다 보면 시간이 지나온 길이 보이고 또 새로 운 길이 시작됩니다. 나의 시가 침묵의 시간을 지나는 분에게 작은 희망과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갱년기 우울증 길고양이 까미 습작 가을동화 구절초
116 이삭 갱년기 우울증 굽은 팔 안에 가두었던 파랑새가 날아간 날 꺼이꺼이 우는 소리 온 밤을 뒤척였다. 방향 잃은 나침반 제자리 뱅뱅 돌아 멀미와 구토에 정신이 혼미하다. 엄마의 세상은 파랑새뿐이거늘 훨훨 날아가니 지구 종말의 날이라. 새롭게 세상을 열어야 할 천지개벽 한발 한발 걸음마를 배우고 세상에서 홀로서기 연습을 한다.
117 길고양이 까미 6개월 된 길고양이 까미가 만삭이다. 조그만 하얀 배를 뒤집어 보여주고 온몸을 비비며 구애를 한다. 마을 입구 정자목을 오르락내리락 작은 소리에 털을 쭈삣 세우고 생사를 오고 가는 도로를 횡단한다. 밤이면 들리는 정자목 비명소리가 아파트 건물에 죽을 듯이 울려 퍼지면 마음은 쓰여 애처로운데 손가락은 자꾸만 계산기를 두드린다.
118 이삭 습작 기억은 가물가물 단어는 좌초한 배처럼 침몰한다. 인생은 지나간 시간만큼 익어가야 하는데 어설픈 삶은 늘 연습작이 되어 구깃구깃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우편함에 쌓여있는 우편물처럼 미처 찾아가지 않은 삶의 기록들을 회수하는 날 오래 묵혀두었던 기억을 끌어당겨 한 땀 한 땀 노 트에 수를 놓는다.
119 가을동화 너의 손사래에 가을이 물들다 툭툭 떨어져 곁에 머물러 속닥속닥거리지 긴 이야기 풀어서 밤을 꼬박 지새우고 하늘에 별 꼬리 하나 길게 남겨두지 네 가슴에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 오면 가을은 빛바랜 일기장에 곱게 물든 단풍잎 하나 넣어두고 사랑했노라 사랑했었노라 지금도 먼 훗날에도 그러하겠노라 눈물로 흔적을 남기고 하얀 겨울로 달려가 기다릴 테지
120 이삭 구절초 가을에 하얀 꽃은 시리다. 순백의 청초함이 눈물겹다 내 어머니의 향기처럼 기쁨과 슬픔이 어우러지는 꽃 척박한 땅에 고운 빛으로 스며 별꽃으로 피어나니 꽃 그림자조차 아름답다. 하얀 빛으로 물드는 가을 시간은 낯익은 체취가 배어있는 한 통의 편지를 배달하고 긴 설렘으로 걸음을 멈추게 한다.
121 김연희 2008년 《시조세계》 시조 등단 시조세계시인회, 경남시조시인협회, 이삭문학협회 회원 저서 시집 『수국처럼 우리도』, 『내 옆에 길이 있어』(공저) 『시조세계시인회 사화집』 외 다수 시인의 말 듣거나 말하기를 좋아하며 읽기와 글쓰기를 즐기며 책을 좋아한다. 갈수록 시향 겉멋에 들어 노심초사하는 앞과 뒤를 돌아보며 힘을 얻는다. 쑥부쟁이의 꿈 올 삼월에 하지 무렵 별들에게 물어봐 관종
122 이삭 쑥부쟁이의 꿈 긴 그리움 꽃말을 떨치고 일어서서 내 안에 숨은 끼를 확인받고 싶어 한다지 벽계수 언저리만 돌던 2% 부족한 정열 일찍이 너 내 없이 우리가 철없던 때 엿장수 가위소리에 호로록 반하여서 엿가락 몇 자루에 바꾼 묵은 세월의 갈피들 오래전 꿈을 꾸던 붓자루에 홀린 기쁨 새로운 인연의 끈을 부여잡은 손길로 예정된 타임캡슐에 먹물 듬뿍 찍어보라 청산을 끌어안고 흐느껴도 어여쁘다 쑥부쟁이가 꿈꾸는 세상의 밑그림 이제는 숨지만 말고 노둣돌을 놓으렴
123 올 삼월에 해마다 삼월이면 언 땅 사륵 녹아서 겉보기와 대개 달라 허물어지는 기미처럼 한순간 맥 놓을 때가 내겐 더러 있더라. 무심한 척 한계령 노래를 흥얼거리며 쑥 캐며 입 앙다물고 허기를 달래는 봄 결핍의 불만증세가 종종걸음 걷게 하여도 남 보면 고개 저어 손사래도 일쑤지만 밑돌 빼서 윗돌 괴는 내 삶이 여물어져 모퉁이 머릿돌 하나 가까스로 세운다.
124 이삭 하지 무렵 가마솥 밥 화덕 고등어 한 끼를 먹다가 옆 테이블 대가족 식사에 곁눈질하다 불현듯 회한이 들어 밥알이 목에 박힌다. 아궁이 잔불에 간 갈치 구워 내서 온 식구 밥상에 올려주던 아버지 짹짹짹 제비 입 모양 받아만 먹었지요 등 따숩고 내 배가 부르니까 보이는 그 자리가 아쉽고 그리워서 부럽다 모시지 못하는 두 분 울컥 만나다.
125 별들에게 물어봐 상상은 쌍쌍 파티 아리랑 고개로 외로워 지쳐서도 살아 있었으매 만사가 허용의 범주 안에 아우리다. 얼씨구 그래도 가끔 도발적인 매력이 아직은 봐줄 만하다. 말로 절을 짓는 존재의 가치를 확실히 전해져서 흥감하고 말고요 덕분에 환한 한나절 낮달로 떠 있어요 꽃들의 말만큼이나 내 맘은 수시로 별빛에 가닿아 피었다 지지요 꽃 대신 궁금증이 도져서 절씨구 별들을 쳐다보고 문안을 드려요 거기도 안녕한지요 멍때리기 하며
126 이삭 관종 너, 라는 열기구는 착륙을 시도하는데 나, 라는 여객기는 이륙하며 비행 모드 처음과 끝을 기억해 퍼뜩 어그리하다 보이는 게 다인 듯, 다가 아닌 게 세상사 존재의 가벼움이 측량의 법칙처럼 관계와 경계 틈 사이 용케 줄 타는 광대 이녁의 생글거리는 눈매가 신스틸러 머리핀 눈화장으로 덮여도 흔들리고 내리는 묘하게 살피는 또 다른 눈이 길냥이처럼 눈웃음 살살치는 여배우 배꼽마저 훔치다 관계는 개뿔, 콧김이 여우 꼬리 값 재더라
127 황윤희 2023년 《문화와 문학타임》 등단 사회복지학박사, 보건학박사, 글로벌뉴스통신 보건복지연구소장 이삭문학협회 회원 동원과학기술대학교 보건행정학과 겸임교수 시인의 말 시는 특별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을 담는 언어라고 믿습니다. 기쁨은 함께 나누고, 슬픔은 서로 위로하며, 한 줄의 시가 누군가에게 작은 쉼과 용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이삭처럼, 사랑과 나눔의 향기를 오래 전하는 시를 쓰겠습니다. 괜찮다는 말 하나면 어머니 그대를 부르면 내 마음의 풍차 저울 위의 감정들 쫄지마, 너는 스스로 빛난다
128 이삭 괜찮다는 말 하나면 가끔은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을 때가 있다 말을 꺼내려다 목이 메이고 울컥한 감정에 문장이 흩어진다 결국 조용한 고요 속에 스스로를 가둔 채 머물게 되곤 한다 그럴 때 누군가 조심스레 건네는 한마디 그 짧은 문장이 따뜻한 손처럼 마음을 살며시 토닥여 준다 “오늘은 그냥, 숨만 쉬어도 괜찮아.”
129 어머니 그대를 부르면 어머니를 부르면 눈물이 난다 가슴에 남은 그 청춘의 흔적을 따라 마음속에 피어난 풍경은 그리움의 산장 어머니여, 그 기억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고난의 그림자 속에 서 있을 때 어머니 그대를 부르면 위로와 마음의 상처를 감싸안고 새로운 희망의 문이 열린다 어머니는 내 삶의 안심과 지지 힘들 때 내 곁을 지켜주는 삶의 나침반이요 가장 소중한 보물입니다. 어머니를 부르면 눈물이 번져 나의 해바라기 햇살처럼 빛을 안는다.
130 이삭 내 마음의 풍차 내 마음 언덕 위에 하얀 풍차 하나 서있네 바람이 불면 삶의 무게도 노래가 되고 슬픔마저 부드럽게 흩날리네 돌고 도는 날개마다 희망이 실려 나와 어제의 눈물을 오늘의 빛으로 바꾸고 언젠가 멈출 듯 흔들려도 다시 일어서 돌아가는 풍차처럼 나의 마음도 끝내 포기하지 않으리 그곳에 늘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고 희망의 불빛이 꺼지지 않기를
131 저울 위의 감정들 내 앞에 놓인 저울 위로 감정들이 하나씩 올라선다 상처는 깊은 흠집을 남기고 무거운 돌처럼 내려앉는다 희망은 가볍게 떠오르지만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하고 긍정의 바람에 밀려 잠시나마 마음을 덮는다 시간은 저울의 무게를 달아 외로움과 함께 균형을 이룬다 끝도 없는 흐름 속에 외로움은 나의 고요한 동반자 그러나 내려놓음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 감정의 무게를 가만히 내려놓을 때 저울은 비로소 평형을 찾아 가벼운 마음이 되어 나를 품는다
132 이삭 쫄지 마, 너는 스스로 빛난다 두려움에 움츠리지 마라 세상의 무게는 네 안에 깃들고 세상의 중심은 언제나 너다 남의 그늘에 서지 않아도 된다 남의 빛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 너는 스스로 빛나는 존재이니 작은 등불 하나가 밤을 밝히듯 네 빛은 이미 충분하다 세상은 그 빛으로 새롭게 숨 쉬리라 그러니 쫄지 마라 세상은 네 중심에서 오늘도 다시 시작된다
133 황윤미 2023년 《문화와 문학타임》 등단 이삭문학협회 회원 시인의 말 말로 다 전하지 못한 마음은 조용히 한 줄의 시가 되었고, 흘려보낸 계절들은 한 편의 시로 다시 피어났습니다. 기쁨도, 상실도, 기다림도, 사랑도 결국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마음임을 시를 통해 배웠습니다. 이 작은 시들이 당신의 마음에도 조용히 닿아, 오래도록 따뜻한 위로와 작은 용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명품가방 삶을 돌아보며 꽃에 대한 사색 가슴이 뛴다 이별의 후회
134 이삭 명품가방 나에게 주어진 명품가방, 그 안에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길을 걸을 때마다 모든 시선이 나를 향하고, 그들의 부러움 속에서 나는 가슴속 깊이 숨겨진 기쁨을 느낀다. 가방을 메고 있으면, 마치 세상 모든 것이 내 것이 된 듯 행복과 기쁨이 가득 찬다. 하지만, 이 가방이 나를 만든 것은 아니다. 이 가방이 가져다주는 가치는 겉모습에 있지 않다. 내 안에 숨겨진 진정한 힘과 내가 걸어가는 길에서 찾은 평화. 그 가방 속에 담긴 것은 오직 내면의 신뢰와 믿음. 그것이 바로 나의 명품이다.
135 삶을 돌아보며 침묵해야 할 때를 몰랐고, 경청해야 할 때를 몰랐으며, 배려와 사랑, 그 귀한 때를 매번 놓치곤 했습니다. 때로는 달래야 할 마음을 외면했고,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지 못했으며, 정작 당당해야 할 순간에는 비겁하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모진 세월의 강을 건너고서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 모든 서툶이 내게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책임을 감당하기엔 너무도 가벼웠던 청춘, 확신 없이 흔들리던 젊은 날의 방황은 결국 나를 찾아가는 고통스러운 여정이었음을. 이제는 안갯속 같던 내 안의 확신을 믿습니다. 지나온 모든 '모름'을 딛고 일어서 비로소 나답게, 가장 당당한 삶의 길을 걸어가려 합니다.
136 이삭 꽃에 대한 사색 꽃은 결코 다투어 피지 않는다. 형형색색, 저마다 흘러온 물길 따라, 가져온 인연의 결을 따라, 한 송이, 또 한 송이 피어날 뿐. 나를 향해 머무는 눈길 하나에, 툭 하고 넘어와 주는 말 한마디에 스스로 눈을 떠 하루의 소명을 다하고, 낮과 밤을 스치는 햇빛과 별빛을 동무 삼아 무심히 저만의 수행길을 걷는다. 비바람 풍파에 세차게 흔들려도 떨굴 것은 떨구고, 지킬 것은 끝내 지켜내며 대지 위에 외발로 선 채 가지마다 속 깊은 뚝심을 밀어 올려 이토록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전하는구나
137 가슴이 뛴다 쿵쿵, 두근두근, 내 몸도 덩달아 쿵쿵,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이 멈추지를 못하고 쉼 없이 뛴다. 젊은 시절, 태양처럼 뜨겁게 뛰었던 가슴은 세월의 풍파 속에 잠시 숨죽여 있었을 뿐. 녹슨 칼날이 아니라, 더 깊어진 지혜의 검으로 인생의 후반전, 나는 다시 한번 고동치기 시작했다. 사라진 줄 알았던 꿈이, 잊힌 줄 알았던 비전이 먼지 쌓인 지도를 펼치며 다시 나를 부른다. "너무 늦었어."라는 세상의 차가운 편견을 잠재우고, 내 안의 가장 찬란한 불꽃을 다시 지피라 한다. 주저함과 두려움이 머물던 그 자리를 '도전'이라는 이름의 위대한 용기가 채워지고, 나는 다시, 출발선에 선다. 내 가슴이 뛰는 한, 모든 순간은 '시작'이며 내 숨이 닿는 곳마다, 길은 새로이 열린다. 자, 이제 다시 대지를 힘차게 박차고 나가자. 우리의 진짜 축제는, 바로 지금부터다.
138 이삭 이별의 후회 만남을 이루니 어느덧 무관심이 찾아와 이별을 이룬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 본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슬픔이 밀려오고 그리움이 밀려온다. 꽉 찬 가슴이 눈물이 되어 흐른다. 만남과 이별은 나의 선택이라는 걸 ...
139 김정숙 2019년 《청옥문학》 시 부문 등단 부산문인협회, 이삭문학협회 회원 토지문학상 수상 (2023년 특별상) 천성문인협회 제2회 전국 시 낭송대회 대상 일두시낭송대회 본상 수상(2023년) 시인의 말 나의 흔적들이 추운 날 따스한 햇살이 되고 더운 날 시원한 바람이 되기를 바란다. 천년의 신비 온천천 믿음의 날개 위에 아버지의 지팡이 가을, 너 참 예쁘다 내 안의 오래된 나무 한 그루
140 이삭 천년의 신비 온천천 푸르른 삶의 순간 감싸 안고 달려왔다 하루의 깊은 한숨 말끔히 씻어낸다 금정산 천년의 젖줄 흘러라 벚꽃길 유채꽃밭 두루미 노니는 곳 시원한 강줄기에 고단한 삶 씻어내며 어머니 따스한 품속 자장가를 부른다 뜨거운 땀방울은 어둠 속 불꽃 되고 숨 가쁜 시간들은 향기로 피워난다 힘차게 흐르는 부산 새 역사를 만든다
141 믿음의 날개 위에 믿음의 씨앗 뿌려 소망의 꽃으로 피어나고 사랑 가득한 햇살 아래에 기도의 문이 열리는 아침이 오면 감사의 시간 속에 익어가는 수고로움들 평화로운 저녁 종소리에 넉넉한 가슴 가슴마다 행복의 날개 위에 밤하늘 별빛은 눈부시게 빛난다
142 이삭 아버지의 지팡이 우리에게 언제나 세상의 지팡이 되어 주셨던 아버지. 눈 오던 날 미끄러져 고관절 수술 후 아버지의 버팀목 되어 준 지팡이가 신발장 곁에 비스듬히 한겨울 바깥에서 뛰놀던 두 손 녹여주던 아랫목의 따스한 온기로 묵묵히 섰다. 지난 요양병원 방문에 어머니만 알아보시고 자식들 기억은 하나씩 지우개로 지우는 중이다. 가장 가벼운 영혼의 무게로 떠나실 준비하는 듯하다 끝이 닳은 지팡이 바닥에 묻은 먼지처럼 가벼운 한 영혼이 현관 옆 신발장에 기대어 어머니의 세상을 버티고 서 있다.
143 가을, 너 참 예쁘다 가을이 참 예쁘다 노란 은행잎 속에 네가 있고 노랗게 물든 메타세콰이어 속에도 네가 웃으며 손짓해 준다 황금빛으로 물든 거리를 걸으며 너를 느끼는 순간순간 행복해 가을이 이토록 아름다운 건 네가 이 가을 속에 함께하기 때문이야
144 이삭 내 안의 오래된 나무 한 그루 떨어진 낙엽 속엔 한 그루 나무가 산다. 한 그루 나무의 수많이 뻗어나간 가지들처럼 나뭇잎 하나의 수많은 잎맥은 우리 몸의 수많은 혈맥처럼 하나로 이어 있다. 떨어진 나뭇잎은 뿌리로 돌아가 나무의 거름이 되어 주고 서로 다른 나무에 사랑을 전해주며 새 생명을 키워 간다 하나에서 시작된 우리 서로 다른 모습의 너와 나 내 속에 내 부모와 네 부모가 나의 하느님과 너의 하나님이 모두 살아 숨쉰다. 나와 너 안에 내 부모 내 형제와 이웃들 우리 모두의 모습이 들어와 있다
145 우리 속에는 너의 모습과 나의 모습이 태초의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 영에서 시작돼 영원으로 이어지는 알파와 오메가로 시작과 끝이 하나의 연결 고리로 너와 내가 하나의 혈맥으로 끝없이 이어져 살아 숨쉬고 있다 너와 나 속엔 하나의 보이지 않는 선율로 한 핏줄로 끈끈이 이어진 한 그루 나무가 있다. 떨어진 나뭇잎들이 서로 다른 나무의 뿌리에게 생명을 키우는 사랑이 되듯 우리 속에 떨어져 붉게 타는 사랑의 마음 되어
146 이삭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나무를 키우는 맘으로 태초부터 시작된 인연 속에 아름답게 살아간다.
147 유광(柔匡) 김현성 2023년 《문예시대》 신인문학상 수상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변호사, 시인, 이삭문학협회 회원 시집 『내 옆에 길이 있어』(공저) 저서 『철인정치, 왜 지금 철인정치인가』 등 시인의 말 행복은 발견하는 자가 주인이다. 주변에 널려 있는 행복의 파편들을 찾아 오늘도 두리번두리번 한발 한발 내딛는다. 행복 방정식 프란치스코의 기도 다리 하나 더 놓게 하소서 가로등과 벚꽃나무 사랑의 수수께끼
148 이삭 행복 방정식 기대치를 분모로, 충족치를 분자로 놓은 나만의 일차함수 분모를 줄이면 더 행복해질까. 분자를 키우면 더 행복해질까. 치열한 수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날들 어쩌면 기대치 분의 충족치가 1일 때 가장 행복할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계산기를 멈춘 순간 텅 빈 분모와 분자 사이에서 행복은 말없이 미소 짓고 있었다.
149 프란치스코의 기도 천국 같은 그곳에서 지옥 같은 이곳으로 오신 그대여, 부디 황폐한 이 땅을 위해 기도하소서. 천국 같은 한국에서 지옥 같은 바티칸으로 오신 그대여, 부디 고독한 이 교황을 위해 기도하소서. 천국은 언제나 아득히 멀고 지옥은 이토록 숨결처럼 가까우니, 아, 마침내 나를 위해 기도하소서. 우리는, 진정 이리도 찬란한 지옥에서 살고 있단 말인가.
150 이삭 다리 하나 더 놓게 하소서 내 속에 견고한 담벽을 쌓고 있다면 누구도 나갈 수 없고, 누구도 들어올 수 없으니 그 지독한 고립이 바로 지옥입니다. 바라옵건대, 이제라도 이 단단한 벽을 허물게 하소서. 내 안에 아득한 다리를 짓고 있다면 기꺼이 그대에게로 건너가 숨결을 나눌 수 있으니 그 따스한 연결이 곧 천국입니다. 원하옵건대, 내 생애 그대에게 다리 하나를 더 놓게 하소서.
151 가로등과 벚꽃나무 벚꽃나무가 가로등을 품어서일까. 빛을 입고 피어난 봄날이 눈부시게 투명하다. 세상을 흐리던 미세먼지조차 이 눈부심 앞에서는 자취를 감춰 버렸다. 어느덧, 내 마음도 화사한 봄날이다. 세상 먼지 하나 없이 산뜻하고 투명해졌다. 내가 그대를 품었기 때문이다. 저 봄나무처럼
152 이삭 사랑의 수수께끼 그녀의 달콤한 미로 속에 갇혀 매일 밤, 내 마음은 길을 잃는다. 알쏭달쏭 수수께끼를 던지는 그녀 갈팡질팡 오답만 적어내는 머쓱한 나 예측할 수 없는 여름 날씨 같고, 어김없이 다시 떠오르는 태양 같다. 사랑이 풀지 못할 지독한 수수께끼인가. 아니면 그녀가 해독할 수 없는 암호인가. 어느 날, 문득 감았던 눈을 떠 거울 앞에 서니 그녀가 아니었다. 내가 바로 수수께끼였다.
153 정영희 2018년 《부산문학》 시 등단, 2025년 《시창작》 시조 등단 영호남문인협회, 시창작, 한국디카시, 이삭문학협회 회원 시인의 말 사계절의 특색을 누리며 살아가는 삶처럼 詩 세계의 묘미를 엮어갈 수 있는 좋은 인연입니다. 만족하며 벗에게 여유 있는 발걸음 소나무재선충 아침에
154 이삭 만족하며 산색이 좋아 한 호흡 여유 있어 발걸음 옮기며 눈길 보내니 강줄기 따라 초목이 늘어져 줄 잇고 푸른 풀빛 강물에 헤엄치니 길손의 마음도 뜀뛰기 하는데 눈에 들어온 백로의 날갯짓과 걸림 없이 불어오는 바람결에 잊었던 여유로움 자리하니 하늘 아래 만족이라 더 흐뭇함 찾지 않아도 좋은데 숨어 우는 새소리에 마음이 맑아지고 무언가 좋아지고 싶은 마음 깊어 새 정신 가다듬어 초연히 자연에 정붙이고 이대로만 살고 싶다
155 여유 있는 발걸음 연둣빛 자라 성숙해지는 산에 산나물이 성품 따라 자라는데 고갯길에 서 있는 나무들 모양대로 운치 있다만 간간이 칡넝쿨에 덮인 나무 바람에 흔들리며 갑갑하다 신음할 때 어디선가 딱따구리 콕콕 먹이 찾고 나뭇가지에 산까치는 펄펄 날아 바쁘다 꽃가지 늘어뜨린 하얀 찔레꽃 향낭 터뜨려 사방에 진동하고 다슬기가 살아가는 편안한 개울에는 물끼리 어울리며 찰찰 거리는데 새들이 앉아 놀던 너럭바위는 햇살 좋아 쉬어가라 손짓하니 한세월 쉬어가는 여유로움에 나그네 초연히 자연 속에 노닌다
156 이삭 소나무재선충 풀잎에 맺힌 이슬 들판을 적시는데 연둣빛 짙어가는 성숙한 뒷산에는 버섯과 산나물이 성품 따라 자라나고 사철에 옷 한 벌 녹침으로 세운 절개 파고든 솔수염하늘소 뿌리치지 못하고 녹음 속에 갇힌 채 호령하던 기개 접어 붉은 도포 걸친 넋 하염없는 신음뿐 세월에 부침해두고 푸른 눈을 감다니
157 벗에게 눈길마다 초록으로 산색 좋아 정감 흐르는 폭 넓은 강을 따라 흘러가는 저 강물의 의지처럼 미로형 술래잡이 인생살이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자의든 타의든 의지이며 노력이고 눈앞에 드러나는 현상마저 정성인데 돌아보면 아쉬움만 남는다오 이제는 하고픈 일을 하며 앞만 보고 갈 것을 다짐하오
158 이삭 아침에 청아한 새소리에 아침이 깨어나고 무성한 풀잎에는 이슬이 가득할 때 하늘빛 청명함으로 세상의 문 열린다 애호박 길러내던 돌담에 햇살 앉아 긴장을 풀어헤친 방아깨비 쉼 할 때 텃밭에 고추잠자리 춤추기에 바쁘다 산등성 끝자락에 구름이 쉬어가고 저 멀리 산새소리 지저귐이 더해가니 정겨운 친구 소식을 물어온 듯 반갑다
159 해설 『이삭동인지 제2집』을 읽고 이광성 시는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새롭게 경험하게 하는 언어이다. 일상의 언어가 사물의 이름 을 부르고 의미를 전달하는 데 머문다면, 시의 언어는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하며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생 명의 결, 축적된 시간의 흔적, 존재의 떨림을 드러낸 다. 마땅히 시는 적는 시인의 시선과 언어를 통해 그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시를 읽으며 새로운 정보를 얻기보다, 이미 알고 있다고 믿었던 삶을 시인 의 시선으로 새롭게 만나게 된다. 그래서 시는 현실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익숙한 삶을 시인의 시선으 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예술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시를 쓰는가. 세상을 바꾸기 위 해서일 수도 있고, 지나간 시간을 붙잡기 위해서일 수 도 있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대상의 아픔을 한 줄 의 언어에 담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상처를 견디기 위해 쓰고, 누군가는 지독한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쓰며, 또 누군가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시를 쓴다. 그러나 그 다양한 이유의 밑바탕에는 삶을 끝까지 응시하려는 의지가 자리하고 있다. 문학은 승
160 이삭 자의 기록이 아니라, 상처 입고 변방으로 밀려나면서 도 끝내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존재들의 아픔을 대변 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동인지는 단순히 여러 사람의 작품을 묶은 책이 아니다. 서로 다른 삶과 시선, 언어와 사유 가 한 권의 책 안에서 만나 하나의 문학적 성취를 이 루는 공동체의 기록이다. 각자의 시는 서로 다른 방향 을 바라보지만, 함께 모였을 때는 하나의 시대를 증언 하고 한 공동체의 문학적 지향성을 보여준다. 동인지 안에 있는 개별 작품의 울림은 공동체 안에서 더욱 깊어지고, 공동체의 정신은 다시 개별 작품을 더욱 빛 나게 한다. 『이삭동인지 제2집』은 이러한 의미를 잘 보여주는 결실이다. 스물한 명의 시인이 써 내려간 105편의 시는 서로 다른 목소리와 정서를 품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이삭 줄기에 달려있는 낟알들처럼 하나의 문학적 공동 체를 완성한다. 『이삭동인지 제2집』은 개개의 낟알이 아니라 수많은 낟알이 함께 어울린 결실이다. 서로 다 른 낟알이 한 줄기의 이삭을 이루듯, 각기 다른 삶과 언어를 지닌 시인들이 한 권의 동인지를 통해 하나의 문학적 가치를 만들어 낸 바로 그 결실의 과정이다. 더욱 뜻깊은 것은 이것이 제1집에 머물지 않고 제2 집 발간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제2집의 발간은 단 순한 숫자의 증가가 아니라 문학 공동체가 꾸준히 발
161 전하고 성장해 왔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한 권의 동 인지가 발간되는 데에는 작품을 쓰는 시간뿐 아니라 서로를 격려하고 기다리며 함께 걸어온 시간이 층층이 쌓여 있다. 그런 점에서 『이삭동인지 제2집』은 이삭 문우들의 작품집인 동시에 이삭문학협회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물음과 사유를 품고 『이삭동인지 제2집』의 105편을 읽어나가 본다. 제2집에 실린 각각의 작품은 개별적인 시를 넘어 한 시대를 살아가는 스물한 명의 시인들이 자신의 시선으로 세상과 나눈 대화의 기록이 다. 또한 『이삭동인지 제2집』에는 가족과 일상을 노래 하는 서정시, 시대의 아픔을 담은 시, 자연 보호의 경 각심을 일깨우는 생태시, 자신의 문학적 성취의 과정 을 담은 메타시와 현대적 이미지와 존재론적 사유를 통해 새로운 시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다양한 작품들이 눈에 띈다. 좋은 작품이 많아 이 글에 다 담고 싶지만 지면 관계상 각 시인의 작품 중에서 선정한 1편의 작 품들을 중심으로 각 시인이 구축한 시적 세계와 그 미학적 특성을 살펴보고, 『이삭동인지 제2집』이 우리 지역 문학과 동인지 문화 속에서 지니는 의미를 함께 모색하고자 한다.
162 이삭 말 실랑이 다음 날 아침밥은 시어머니 차지다 둥근 식탁에 가시 돋친 조기가 웅크리고 있다 삼겹살 사다 노랗게 구워 나 혼자 처묵는다 먹지 않은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다 ‘시어머니한테 항상 공손하고 말 한마디라도 부드럽게 해야 쓴다 잉’ 박힌 가시 빼내 주신 아부지 까마귀가 된 구순 어머니 매누리가 차려 준 밥상이 제일 맛나다며 석류로 벙그레 웃으신다 가시 없는 순살 고등어 밥이 꿀이다 시를 쓰면 쌀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시를 쓰면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난 섬이 된다 강지윤 「섬이 된 여자」 전문 강지윤 시인은 섬에서 태어나 섬이 된 시인이다. 시 를 적기 위해 스스로 섬이 된 시인이다. “말 실랑이 다음 날 아침밥은 / 시어머니 차지다” 일상의 사소한 갈등 속에서도 강지윤 시인의 시에 대한 애정은 지속 된다. “둥근 식탁에 가시 돋친 조기가 웅크리고 있다”
163 먹지 않은 조기의 가시가 목에 걸린다. 이 불편한 상 황에서도 강지윤 시인은 시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는 다. 시인은 시에 들어가고, 다시 시 밖으로 나와 밥상 에 앉는다. 시가 아름답다는 것, 시인이 어떠한 순간 에도 행복하다는 것은 시인에게는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시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보는 세계가 넓고 높기 때문이다. 강지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스스 로 섬이 된다. 시를 쓰면 웃음이 나온단다. “시를 쓰 면 쌀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 / 시를 쓰면 웃음이 나 온다” 섬에서 태어나 시를 쓰면서 스스로 섬이 된 강 지윤 시인의 웃음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고독(孤獨) 대상이 필요했지요. 하지만 중심을 비울 수 있는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달팽이 걸음으로 사막을 지나느라 고단해진 꿈이 달아나지 않게 기다림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러다 주머니 속으로 숨어든 나비 온 세상 빛이 두근거렸지만 누가 볼까 달항아리에 넣어 두었습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알아주길 바랐지만 들킬까 두려운 시끄러운 고요가 어떻게 발화하는지 팽창할 수 없는 그늘에서
164 이삭 잠자던 나비가 시간이 지운 길 찾아 달뜬 나래짓 합니다. 김남숙 「쓸모 있는 기다림」 전문 쓸모 있는 기다림은 무엇일까? 어떤 경우에 기다림 이 쓸모 있을까? 우리는 보통 결과만을 가지고 한 사 람의 삶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봄에 새싹이 땅을 뚫고 올라오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 얼어붙은 땅 아래 치열하게 자신을 연마한 씨앗의 노력과 기다 림의 과정은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 든 일에는 저절로 이루어진 성공은 없다. 자신을 던져 본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기다림이 쓸모 있는 기다 림이다. 김남숙 시인의 ⌜쓸모 있는 기다림⌟은 기다 림을 통해서 실제로는 내면의 시인이 가진 꿈, 창작에 대한 노력, 자아 성찰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고독 과 결핍의 대상으로 “중심을 비울 용기”를 자책하고, “달팽이 걸음으로 사막을 지나느라 / 고단해진 꿈이 달아나지 않게” 더 높은 비상을 위하여 “기다림을 끌 어안”는다. 그 기다림은 나비를 탄생시키고, 시인의 내적 성숙의 표상인 나비를 아무도 모르게 달항아리에 숨겨두고 “들킬까 두려운” 시인의 꿈이 발아하기를 기 다린다. 달항아리는 구속과 억압의 공간이면서도 숙성 과 성장의 공간이고 완성과 화합의 공간이다. 김남숙 시인이 시에 표출하는 정서의 근원은 개인적인 다짐과 시에 대한 자세로 메타 시적인 느낌이다. 이 시 전편
165 을 읽으면 시인의 서정적 자아 인식이 견고함을 알 수 있다. 별빛은 빛의 끝. 부서진 영혼이 하얗게 타고 있는 자 세. 다 타고 나면 눈이 되어 내린다. 하얀 눈은 소멸로 가는 마지막 유언. 유언에 애도를 더하면 땅에 스며들 어 영혼의 지문을 남기지. 공간 사이로 추락하는 빛. 틈을 벌리면 공간이 될까. 나는 멈추어 서서, 자세를 세운다. 빌라 뒤편 먼지색 몽고간장 말통 옆, 도시가스 배관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면 목이 꺾인 새처럼 나 선으로 떨어지는 이파리. 무너지는 햇볕에 부유하는 지 구가 보인다. 꿈꾸지 않는 잠은 죽음 같아서 이불을 밀어낸다. 죽음도, 꿈도 없는 하루가 시작된다. 빛 속 에서 빛이 보이지 않는 하루. 공간을 밟고 선 그네가 바라보는 끝, 속도의 끄트머리에서 들려오는 정적. 줄 을 끊어버리면 끝을 넘어갈 수 있을까. 오늘도 나는 나로부터 추락한다. 눈을 감으면 들려오는 바람의 비 명, 나의 비명. 오래된 껍데기 속 어린 영혼이 주먹을 휘두르듯 공간을 내던지고 있다. 펄럭거리는 정적, 부 유하는 것들이 만든 각도. 이 밤, 지구가 머리 위로 오 면 뒤집힌 추락을 만날 수 있을까. 목이 꺾인 새의 눈 에서 빛의 끝이 다시 날아오른다. 박원배 「부유하는 각도」 전문 박원배 시인의 「부유하는 각도」는 삶과 죽음, 추락 과 비상, 현실과 우주를 하나의 의식 속에서 교차시키
166 이삭 며 존재의 본질을 탐색하는 시다. 이 시는 하나의 중 심 이미지를 끝까지 변주하며 의식의 흐름을 일관되게 이끌어 간다. 이 시는 추락의 끝은 또 다른 방향의 비 상임을 나타낸다. 현대시 특유 이미지의 비약과 상징 의 중첩, 반복과 변주를 통해 사물의 물리적 운동을 인간의 존재론적 문제로 전환시킨다. 우주적 이미지와 일상적 사물을 연결하여 ‘추락’과 ‘부유’라는 대립적 이미지를 통하여 시 전체의 긴장감을 이끌어가고 있다. 처음의 별빛이 “목이 꺾인 새의 눈에서 빛의 끝이 다 시 날아오른다.”로 되돌아오는 원형 구조를 견고히 하 고 있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자리에서 다시 시작이 태 어나는 장면은 죽음과 소멸조차 새로운 생성의 가능성 을 품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이 시는 절망을 말 하는 작품이라기보다, 끝없는 질문을 통해 존재의 새 로운 방향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작품으로 읽힌다. 창백한 거리가 미행합니다 바닥을 끌며 뒷덜미 낚아채는 차가움 뒤따라오는 외침은 수의를 입고 뒤집힌 낙엽처럼 부서집니다 파고드는 송곳 바람이 심장을 태우고 좀 먹은 우리들의 맹세가 차디찬 인디고를 잘랐습니다 닭 울기 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처럼
167 서로를 부정하는 악수는 뼈마디 꺾는 비웃음으로 쌓입니다 육박하는 새벽이 부풀어 오릅니다 터지지 못한 마디 하나씩 끊고 얼굴을 잃은 메두사가 깨진 보도블록 위에서 우리들의 함성을 오려냅니다 이광성 「육박(肉薄)」 전문 나 자신의 시를 해설한다는 일은 조심스럽다. 객관 적인 거리를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삭동인지 제2집』의 작품들을 함께 읽는 자리인 만큼, 이 작품만은 평론이라기보다 시작(詩作) 노트라는 마 음으로 몇 자 적어 본다. 우리 세대는 젊은 날의 기억을 오래 품고 살아간다. 민주화를 외치며 함께 거리를 걸었던 친구들도 있고, 각자의 삶을 선택하며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들 도 있다. 오랜만에 만나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누군가 는 “너는 변했다”, “너는 우리를 배신했다”는 말을 쉽 게 꺼낸다. 그러나 과연 배신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지키지 못했고, 무엇을 잃어버렸기에 서로의 삶에서 끊임없이 배신의 흔적을 찾는 것일까. 「육박(肉薄)」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 시이 다. 이 작품은 우리 세대가 겪어 온 불안과 관계의 균
168 이삭 열을 이미지의 충돌을 통해 형상화하고자 했다. 제목 인 「육박(肉薄)」은 단순히 가까이 다가섬을 의미하지 않는다. 피할 수 없이 삶을 압박해 오는 시간과 현실, 그리고 젊은 날의 신념과 오늘의 삶이 맞부딪치는 순 간을 상징한다. 시 속의 ‘창백한 거리’, ‘수의를 입은 외침’, ‘좀 먹은 맹세’, ‘서로를 부정하는 악수’는 모두 시간이 지나며 변질된 관계와 신념의 은유이다. 권력 과 타협한 사람도 있었고, 끝내 타협하지 않았다고 스 스로를 위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서로를 향한 비난과 자기 합리화는 어느새 술자리의 안주가 되었 고, 그 모든 말들을 삼킨 채 귀가하는 길에 어느새 “육박하는 새벽”이 우리 앞에 부풀어온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얼굴을 잃은 메두사”는 특정한 인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사랑도 명예 도 이름도 없이 한평생 나아가자던 뜨거운 맹세는 어 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신념도, 분노도, 얼굴도 희 미해진 채 살아가는 우리 앞에 서 있는 메두사는 젊 은 날의 함성을 한 조각씩 오려낸다. 이 시는 누구를 비난하기 위한 작품이 아니라, 시간이 우리에게 남긴 상처와 그 상처 앞에서 끝내 자유롭지 못한 우리 세 대의 초상을 그리고자 한 기록이다. 텔레비전 불빛 아래 홀로 비워낸 찬밥 한 덩이 장판 무늬를 작은 손가락으로 따라 그리다 졸음으로 빈자리를 덮은 저녁 놀이터를 서성일 때
169 등 뒤로 쏟아지는 무거운 눈빛과 속삭임은 운동화 앞코를 툭툭 치고 지나가고 골목 안 그림자들이 귀가를 재촉한다 기다림 소리에 달려간 현관 밤공기와 같이 온 엄마는 어린 뺨을 감싸안고 당신 품에 넣었다 이불깃은 마른 손가락으로 정돈되고 창틈으로 스며든 고달픔은 골목 그림자가 훔쳐 갔다 오영배 「외 살림꽃」 전문 오영배 시인의 「외 살림꽃」은 출근한 엄마를 기다리 는 아이의 저녁 풍경을 그린 시이다. “기다림 소리에 달려간 현관 / 밤공기와 같이 온 엄마는”에서 보면 엄 마는 일찍 나가고 아이는 혼자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이 시는 엄마의 부재나 아이의 외로움과 결핍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결핍 속에서도 아이 를 품어 주는 어머니의 사랑과 그 사랑이 아이의 상 처를 어떻게 감싸안는지를 조용한 장면들로 보여준다. “텔레비전 불빛 아래 / 홀로 비워낸 찬밥 한 덩이”에 서 오영배 시인은 관념어를 사용하지 않고 장면을 보 여줌으로써 결핍과 외로움을 견인한다. '찬밥'은 단순 히 식은 밥이 아니라 식어 버린 집안의 온기까지 떠
170 이삭 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시인은 이를 비극적으로 과장 하지 않는다. 아이는 장판 무늬를 손가락으로 따라 그 리다가 졸음에 빠진다. 이 작은 행동은 아이가 외로움 을 견디는 방식이자, 놀이로 시간을 메우는 순진함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오영배 시인은 설명보다 장면 을 앞세워 독자와 작당을 하고 있다. 시인은 ‘외롭다’, ‘가난하다’, ‘힘들다’라고 직접 말하지 않는다. 대신 찬 밥, 장판, 놀이터, 운동화, 현관, 이불 같은 생활 사물 을 배치하여 독자가 스스로 아이의 삶을 읽어 내게 하는 노련미를 보인다. 이 작품은 엄마 없는 아이의 결핍을 감정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서로를 지키는 엄마와 아이의 사랑을 통해, 가장 외로운 자리에서도 꽃이 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조용하고 깊은 울림으로 전하는 서정시라 할 수 있다. 여인의 굴곡 같은 해안선을 지난다 고운 금모래 사이 백골이 된 소라 하나 파도를 기다리던 질긴 눈물자국 하얗게 박혀 누워있다 무수히 손을 내밀어 잡을 듯 잡을 수 없었던 속삭임 속삭이는 파도에 몸을 실어
171 어머니 젖가슴 같은 해안선 넘을 수 있다면 일어나자 돌아가자 구겨진 신발 탈탈 털고 생채기 난 하얀 모래가 울고 있다 송창희 「해안선에서」 전문 송창희 시인의 언어는 평이하고 담백한 문체 안에서 일상의 느낌을 작가의 정서로 날카롭게 파고들어 독자 에게 정서적 고백을 한다. 작가의 느낌이나 감성을 현 실이나 사물의 현상으로 형상화하여 해안선에 숨어 있 는 대상의 본질에 다가간다. 삶의 체험에서 리얼리티 를 지향하는 해안선의 이미지를 통해서 슬픔과 아픔을 섬세하고 담백하게 확장하고 있다. 시인이 보는 해안선은 어떤 것일까? 송창희 시인은 해안선을 보고 가슴 깊은 곳에 숨겨둔 자신만의 정서 를 표현하고 있다. 일상의 언어를 빌려 깊은 상징의 바다를 만들어 독자에게 함께 가자고 한다. “여인의 굴곡 같은 해안선”을 따라 하얗게 눈물 자국이 박혀 누워있는 해안선을 시인은 건너간다. 파도에 몸을 싣 고 어머니 젖가슴 같은 해안선을 걸어간다. 그 해안선 에 생채기 난 하얀 모래가 울고 있다. 아마도 시인의 울음이리라. 송창희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사물과 대 상에 대한 깊은 애정과 끊임없는 자아 성찰을 바라본 다. 구겨진 신발을 털고 해안선을 걷는 시인의 모습을
172 이삭 그리며 시인의 기억 속에 있는 생채기를 생각해 본다. 사거리 한 모퉁이 흰 장갑 하나, 내려진 차단기처럼 흔들리는 호흡의 깃발 툭 던져진 인사말, 재잘대는 어린잎들 너머 더딘 혀에 머문 시선들 눈빛에 붙들린 반쪽이 입술 끝을 맴돌다 마른침 뚫고 터진 첫마디 달궈진 얼굴 달려가는 걸음마다 제 몫의 초록을 건넨다 신호가 바뀐다, 또 우수경 「반쪽 신호등」 전문 우수경 시인의 「반쪽 신호등」은 학교 앞 횡단보도에 서 있는 사람을 소재로 삼고 있다. ‘말하지 않고 묵묵 히 자기 일에 충실한 개인’이 결국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아 공동체로 들어가는 과정을 ‘신호등’과 ‘아이들 의 화음’이라는 이미지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173 「반쪽 신호등」은 말없이 신호등 역할을 하는 남자의 경험을 사회적 시선과 존재의 문제로 확장한다. 공동 체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아 가는 과정으로 그 려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특히 ‘차단기-호흡-첫 마디-화음-신호’로 이어지는 이미지의 흐름은 한 사람 의 내면과 사회적 관계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마지 막의 “신호가 바뀐다, 또”는 삶은 한 번의 극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새로운 건넘과 새로운 용기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환기한다. 마지막 행은 독자를 다시 한번 처음으로 돌아가 읽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 여든다섯의 어머니가 딸내미 환갑 생일상을 차리고 있다 오늘은 어머니가 딸 생일상을 차리는 날이다 기운 없고 느린 손길이지만 어머니는 딸이 태어난 날 직접 끓였던 그 미역국 맛을 오늘은 딸에게 맛보게 하는 날이다 세월이 어머니와 딸을 데려가고 있지만 시간은 흐르고 세월은 흘렀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조금도 늙지 않았다 생일상 앞에 앉은 딸은 말이 없다. 조용히 젓가락을 들지만 숟가락 위로 눈물이 고인다
174 이삭 어머니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큰 상일지도 몰라 나이 들지 않는 사랑 표현에 딸은 먹먹해만 하고 있다 이상미 「환갑 생일상」 전문 이상미의 「환갑 생일상」은 화려한 수사나 복잡한 상 징 없이 어머니의 사랑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사실 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시이다. 소재는 매우 일상적이 지만, 그 일상에서 삶의 본질을 길어 올린다. 이 시를 읽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시간은 인간을 늙게 하지만 어머니의 자식을 향한 사랑만은 시간이 지나도 조금도 빛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환갑을 맞은 딸 은 이미 노년에 접어든 사람이다. 그런데도 여든다섯 의 어머니에게는 여전히 태어난 그때 그 아이이다. 세 상 사람들은 환갑을 축하하지만, 어머니에게는 환갑도 여전히 생일일 뿐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딸이 태어난 날 처음 끓여 주었던 미역국을 다시 끓인다. 특별한 사건은 없다. 미역국을 끓이고, 생일상을 차 리고, 딸이 밥을 먹는다. 그러나 바로 그 평범한 장면 이 독자의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든다. 우리는 누구나 부모에게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시간이 흐 를수록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간다. 이 시는 그 잊힌 관 계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마지막의 “숟가락 위로 눈 물이 고인다”라는 구절은 시 전체의 감정을 응축한다.
175 긴 그리움 꽃말을 떨치고 일어서서 내 안의 숨은 끼를 확인받고 싶어 한다지 벽계수 언저리만 돌던 2% 부족한 정열 일찍이 너 내 없이 우리가 철없던 때 엿장수 가위소리에 호로록 반하여서 엿가락 몇 자루에 바꾼 묵은 세월의 갈피들 오래전 꿈을 꾸던 붓자루에 홀린 기쁨 새로운 인연의 끈 부여잡은 손길로 예정된 타임캡슐에 먹물 듬뿍 찍어 보라 청산을 끌어안고 흐느껴도 어여쁘다 쑥부쟁이가 꿈꾸던 세상의 밑그림 이제는 숨지만 말고 노둣돌을 놓으렴 김연희 「쑥부쟁이의 꿈」 전문 김연희 시인의 「쑥부쟁이의 꿈」은 한 송이 들꽃을 통해 인간의 삶과 예술적 성장을 은유한 작품이다. 화 려한 꽃이 아닌 쑥부쟁이를 시의 중심에 세운 것은 늦게 피더라도 자신의 계절을 기다리는 존재의 아름다 움을 말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 시를 읽고 나면 누 구나 한 번쯤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그리움과 자신의 꿈을 마주하게 된다. 쑥부쟁이는 가을에 피는 귀여운 꽃, 꽃말은 그리움, 기다림이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쑥부쟁이 의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 그리움은 무엇일까?
176 이삭 이성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고, 자기 삶의 성장과 예술적 성숙에 대한 그리움일 수도 있다. “긴 그리움 꽃말을 떨치고 일어서서/내 안의 숨은 끼를 확인받고 싶어 한다지”에서 그동안 숨겨왔던 재능과 가능성에 대한 욕망일 수도 있다. 우리는 먼저 다가가지 못하고 도전해 보지 못한 후회와 연민으로 밤을 새운 적이 몇 번이었던가? 쑥부쟁이는 결국 도전하지 못한 자신 의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김연희 시인의 시어에는 흔 한 대상에서 깊은 의미를 찾아내는 사색과 고뇌의 심 미적 가치를 담고 있다. 시의 저변에는 서정이 배어있 다. 시의 소재는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대상에서 김연 희 시인 특유의 감수성으로 숨어있는 혼을 찾아 우리 에게 보여준다. 연둣빛 돋는 텃밭에 호미 든 아가씨 허리 굽힐 때마다 길게 따라 올라오는 달래 뿌리 손끝에 묻어나는 흙냄새와 옷깃을 스쳐 가는 봄바람 한 줌 한 줌 바구니 가득 차면 들녘엔 환한 분홍빛 강동환 「달래 아가씨」 전문
177 강동환 시인의 「달래 아가씨」는 “연둣빛 돋는 텃밭 에”서 달래를 캐는 한 아가씨의 모습을 그린 짧은 시 이지만, 그 안에는 자연과 인간이 맺는 상호 관계, 그 리고 생명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 시의 미덕은 사건 이나 관념을 앞세우지 않고, 한 장면을 끝까지 관찰함 으로써 봄이라는 계절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데 있다. 봄날 텃밭에서 달래를 캐는 한 아가씨의 모습을 관찰 자 입장에서 담담하게 그려낸 시이다. 시를 읽는 동안 특별한 사건도, 극적인 감정의 고조도 없지만, 오히려 그 소박함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이 시는 화려한 비 유나 난해한 상징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쉽 게 지나치는 봄날의 ‘호미 든 아가씨’의 행동과 자연 의 조화로움을 맑은 언어로 담아낸다. 그래서 읽는 독 자의 마음에도 봄바람처럼 잔잔한 평안이 스며든다. 「달래 아가씨」는 일상의 작은 풍경 속에서도 시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소박하지만 정겨운 서정시이다. 오월의 맑은 햇살 푸른 그늘 우거진데 외로운 대에 홀로 앉아 옛 자취를 생각하네. 솔바람은 솔솔 불고 숨은 새는 지저귀는데 죽성벌 파도 소리 달빛 시내와 어우러지네.
178 이삭 외로운 산하의 육 년 유배 한이 남은 이곳에서 정철과 박인로 가인들의 발자취 여전히 또렷하구나. 세상일 모두 내려놓으니 마음 절로 아득해져 바쁜 중 얻은 참된 즐거움 바로 이 언덕에 있네. 장형순 「황학대에 홀로 앉아」 전문 장형순 시인의 「황학대에 홀로 앉아」 이 작품은 전 형적인 한시(漢詩)나 시조의 정서를 현대어로 옮겼다. 장형순 시인이 황학대라는 장소에 올라 자연을 바라본 다. “오월의 맑은 햇살 / 푸른 그늘 우거진데 / 외로 운 대에 홀로 앉아 / 옛 자취를 생각하네.” 그곳에서 역사적 인물을 떠올리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는 구조로 짜여있다. “오월의 맑은 햇살”, “푸른 그늘”, “솔바람”, “파도 소리” 등 밝고 평화로운 자연 풍경으로 시작한다. 이러한 자연은 단순한 배경이 아 니라 화자의 마음을 열어 주는 공간이다. 홀로 앉아 자연을 마주하는 순간, 화자는 현재를 넘어 과거의 시 간과 만나게 되고, 황학대에 깃든 역사적 의미를 되새 긴다. 황학대는 부산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두호마을 해안 에 있는 바위로, 고산 윤선도가 1618년 기장으로 유 배되어 6년간 머물며 시·서·제문 29수를 남긴 역사적 장소이다. 바다로 돌출된 황색 바위가 황학이 날개를
179 편 모양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익숙하고 설명적인 부분도 있지만 마지막 연에서는 세상사를 잠시 내려놓고 얻는 마음의 평안과 참된 즐 거움을 노래한다. 자연과 역사를 함께 바라보는 경험 이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세상일 모두 내려놓으니 / 마음 절로 아득해져 / 바쁜 중 얻은 참된 즐거움 / 바로 이 언덕에 있네.” 자연의 아름다움과 지역의 역 사, 그리고 삶에 대한 성찰을 조화롭게 담아낸 작품이 다. 분주한 일상에서 잊고 지냈던 내면의 여유를 황학 대에서 성찰하고 삶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낯선 곳을 지우고 나를 채우니 도시가 휘발된 자리에 산이 들어서고 구름은 파란색을 간간이 떼어낸다 타인이 버리고 간 풍경의 사체 위에 눈 자국을 찍으니 애증이 몰려오는 자유를 목격한다 이유가 된 이름을 떠올리고 지우다가 내가 찾은 투명한 자리에 앉아 서로가 서로에게 이끌려 미지의 심해(深海)가 되는 시간 보이지 않는 소음이 터널 속으로 들어와 무거운 침묵의 골조 사이를 횡단하고 있다. 반복되는 일상을 버리고 영혼의 망명을 허하라. 조임경 「망명」 전문
180 이삭 살다 보면 누구나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을 걷는 순례자처럼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다가 영혼의 발길이 멈추는 순간이 있다. 이 순간 우리는 의식은 방전되고 마음이 멍한 순간 어디론가 불쑥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조임경 시인의 「망명」은 낯선 공간으로의 도피가 아니 라, 낡은 자신을 떠나 새로운 자신에게 이르는 내면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망명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 나 라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박해받고 있거나 그럴 위험이 있는 사람이 이를 피하려고 외국으로 몸을 옮기는 것 을 말한다. 시를 읽을수록 이 망명은 국가나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영혼’을 향한 이동이라는 사실을 깨닫 게 된다. 시인은 자기 존재의 망명, 내면의 망명을 이 야기하고 있다. 반복되는 일상의 탈출구로서 망명을 택하고 싶은 것이다. 조임경 시인은 자기 앞에 닥친 현실이나 사물의 현상을 형상화하여, 그 본질에 다가 간다. 이 시의 미덕은 현실을 단순히 부정하거나 회피 하지 않는 데 있다. 현실의 풍경을 해체하면서도 그 속에서 자기 존재의 본질을 찾아 나간다. 조임경의 「망명」은 낯선 곳으로 떠나는 시가 아니라, 더 깊은 나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치열한 내면의 순례길이다. “반복되는 일상을 버리고/영혼의 망명을 허하라.” 물론 그 허락은 세상이 아니라, 결국 내가 나에게 내려야 할 허락일 것이다.
181 하얀 살 비워낸 채 누군가의 손에 들려 따뜻함을 담기도 하고 차가움을 안기도 한다 입술이 닿았다가 멀어지고 손끝에 머물다 버려지는 짧은 인연 덧없는 순간 흔적 없이 사라지는 이름 비울수록 가벼워지고 버릴수록 구겨지는 삶 한번 쓰이고 잊혀질 운명도 누군가의 온기를 품는다 하부광 「종이컵」 전문 하부광 시인의 「종이컵」은 '종이컵'이라는 일상적 사 물을 통해 인간 존재의 소모성과 온기의 역설을 말하 는 작품이다. “하얀 살 비워낸 채 / 누군가의 손에 들 려 / 따뜻함을 담기도 하고 / 차가움을 안기도 한다” 에서 ‘하얀 살’이라는 종이컵의 질감을 사람의 몸처럼 의인화해 ‘따뜻함’과 ‘차가움’으로 나타내어 인간 삶의 양면성을 묘사한다. 이어 "입술이 닿았다가 멀어지고 / 손끝에 머물다 버려지는"이라는 구절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짧은 만남과 스쳐 지나가는 인연을 연상시킨 다. 하부광 시인은 서로 대립되는 언어를 연결하여 종 이컵의 짧은 생애와 인간의 관계와 삶의 유한성을 상
182 이삭 징하며, 사소한 사물 속에서도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 게 한다. 이 시는 화려한 수사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사물을 통해 인간의 삶 과 관계를 성찰하게 하는 시이다. 한 번 쓰이고 버려 지는 종이컵의 운명을 사람의 삶에 빗대어, 존재의 덧 없음과 그 안에 담긴 따뜻한 의미를 담담하게 보여 주고 있다.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작은 온기를 전할 수 있다면, 비록 눈에 띄지 않는 삶일지라도 결코 헛 된 삶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입맛 다신다 연탄불 꽁치 굽는 냄새에 넋을 잃고 접시는 발랑 누워 꽁치를 얌전히 받아 안는다 밥상에 둘러앉은 젓가락들 코끝이 벌렁거리고 거친 어머니 손은 뜨거운 꽁치를 맨손으로 해체한다 대가리, 꼬리, 뼈다귀 바다에서의 몫은 우리 셋이 다 했는데 배급받듯 앉은 젓가락들 접시 위에 꽁치는 이별을 고하고
183 엄마 손에 들린 대가리 어금니에 무참히 부서지고 꼬리와 뼈다귀 씹으시며 젓가락들 앞에선 맛난 척하시고 엄마가 발라준 꽁치를 맛나게 먹던 젓가락들 먼 훗날 젓가락들 꽁치 대가리 어금니로 씹어보니 목젖 달달 떨며 끝내 죄송함에 엉엉 울음 터져 꽁치 대가리는 불효였네 제사상에 영광 굴비 촛대에 촛불은 춤을 춰 정창래 「꽁치는 불효였다」 전문 정창래 시인의 「꽁치는 불효였다」는 한 마리 꽁치를 통해 어머니의 사랑과 자식의 뒤늦은 깨달음을 담담하 게 그려낸 작품이다. 소재 선정과 감정의 축적이 돋보 인다. 어머니의 희생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꽁치의 대가리·꼬리·뼈다귀라는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드러낸 점이 큰 장점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머니의 희생 과 사랑을 알기에는 항상 늦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184 이삭 맛있는 살점만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세월 이 흘러 직접 꽁치 대가리를 씹어 보면서 비로소 어 머니가 평생 가장 좋은 것을 자식에게 내어주고 남은 몫을 묵묵히 감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시는 독자에게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다. 시인이 먼저 울지 않는다. ‘맨손으로 해체하는 어머니’, ‘대가 리와 꼬리, 뼈다귀를 드시는 모습’ 같은 구체적인 장 면들을 담담히 보여 주면서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을 자연스럽게 나타낸다. 그래서 더 후회가 밀려온다. 특 히 마지막에 “꽁치 대가리는 불효였네”라는 고백은 뒤 늦은 후회와 죄책감을 응축하며 깊은 울림을 남긴다. 평범한 식탁의 풍경을 가족애와 효(孝)의 상징으로 승화시킨 점이 인상적이며,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어 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보편적인 공감의 힘을 지닌 작 품이다. 이 시를 읽고 나면 문득 부모님의 밥상과 손 길이 생각나고, 미처 전하지 못했던 감사와 사랑을 돌 아보게 된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언뜻언뜻 떠오르는 무심코 내다본 창밖으로 그 사람이 찾아든다 젊은 날의 아련한 시간들 속에서 누군가 떠오르는 그 사람은 지워질 수 없는 시간을 함께했던 필름이 되었다 지나간 모든 시간을 추억이라고 하지 않는다
185 소리 없이 나의 기억 속에 된서리처럼 각인된 그 사람이기에 지금 아무것도 없는 시간에서도 조용히 다가온다 그 사람 이름은 잊히지 않은 동판에 새겨진 이름과 얼굴이 되어 시간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며 함께 살고 있다 여승익 「소식(消息)」 전문 여승익 시인의 「소식(消息)」은 ‘잊음’과 ‘잊히지 않음’ 의 역설을 주제로 한 회상 시이다. 살다 보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얼굴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 다. 아마도 이름은 흐려졌지만, 존재 자체는 아직 남 아있다는 뜻일 것이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이름이 문 득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 되살아나듯, 숨어있는 기억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삶의 한가운데로 때때 로 스며든다. 여승익 시인의 「소식(消息)」은 이러한 기 억의 속성을 과장하지 않고 차분한 어조로 풀어낸다. “지나간 모든 시간을 추억이라고 하지 않는다”에서 지 나간 시간이라고 모두 추억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 실을 말한다.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삶 의 깊은 곳에 각인되어 현재의 시간 속에서도 함께 살아가는 것임을 보여 준다. 마지막의 “동판에 새겨진 이름과 얼굴”이라는 비유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기억 의 영속성을 상징하며, 그 사람이 여전히 화자의 내면 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음을 강조한다. 이 시를 읽으며
186 이삭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하나쯤 간직한 ‘잊을 수 없는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좋은 추억이든지 나쁜 추억이 든지 누구나 한 사람쯤은 있을 것이다. 이 시는 개인 의 기억을 넘어 보편적인 공감으로 확장되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 시간이 흘러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용한 울림으로 전해 준다. 화려한 표현보다 담담하고 절제된 회상이 오히려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6개월 된 길고양이 까미가 만삭이다. 조그만 하얀 배를 뒤집어 보여주고 온몸을 비비며 구애를 한다. 마을 입구 정자목을 오르락내리락 작은 소리에 털을 쭈삣 세우고 생사를 오고 가는 도로를 횡단한다. 밤이면 들리는 정자목 비명소리가 아파트 건물에 죽을 듯이 울려 퍼지면 마음은 쓰여 애처로운데 손가락은 자꾸만 계산기를 두드린다 노승희 「길고양이 까미」 전문 노승희 시인의 「길고양이 까미」는 길고양이 한 마리 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출발하지만, 결국은 생명 앞에 서 인간이 겪는 연민과 현실에서 느끼는 무력감을 담
187 아낸 작품이다. 시 속의 ‘까미’는 겨우 여섯 달 된 어 린 길고양이지만 이미 만삭의 몸으로 위험한 세상을 살아간다. 하얀 배를 드러내며 사람에게 몸을 비비는 모습에서는 보호받고 싶은 생명의 본능이 느껴진다. 생사를 넘나드는 도로를 건너는 장면에서는 길 위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불안한 삶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시 인은 그 모습을 과장하거나 감상적으로 꾸미지 않고, 일상의 풍경 속에 담담하게 배치함으로써 오히려 현실 의 아픔을 더욱 깊게 전달한다. 특히 마지막 연이 인 상적이다. 밤마다 들려오는 까미의 울음은 단순한 동 물의 소리가 아니라 구조를 기다리는 생명의 절규처럼 들린다. 그러나 시인은 연민만을 말하지 않는다. “손 가락은 자꾸만 계산기를 두드린다”는 마지막 구절은 생명을 돕고 싶은 마음과 경제적 현실 사이에서 갈등 하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사랑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의 벽 앞에서 느끼는 죄책감과 무력감이 절제된 표현 속에 응축되어 있다. 이 작품은 길고양이 를 소재로 삼았지만, 결국은 인간의 양심과 책임을 묻 는 시이다. 생명을 외면할 수도 없고, 품을 수도 없는 우리의 현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노승희 시인은 독 자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생명을 얼마나 사랑할 수 있으며, 또 우리가 처한 현실은 그 사랑을 어디까지 허락하는가. 이러한 여운이 오래 남는다는 점에서 이 시는 따뜻한 공감과 깊은 성찰을 함께 전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188 이삭 가끔은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을 때가 있다 말을 꺼내려다 목이 메이고 울컥한 감정에 문장이 흩어진다 결국 조용한 고요 속에 스스로를 가둔 채 머물게 되곤 한다 그럴 때 누군가 조심스레 건네는 한마디 그 짧은 문장이 따뜻한 손처럼 마음을 살며시 토닥여 준다 “오늘은 그냥, 숨만 쉬어도 괜찮아.” 황윤희 「괜찮다는 말 하나면」 전문 황윤희 시인의 「괜찮다는 말 하나면」은 위로의 언어 가 지닌 힘을 매우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서정시이다. 복잡한 비유나 상징보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정 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살다 보면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 /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을 때가 있다.” 우리 가 살아가면서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속으로 삼킨 적이 얼마나 많은가? 때로는 하늘에 투정도 해보지만,
189 이것도 결국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다. 이럴 때 성숙한 사람은 담담히 받아들인다. 현재에 더 집중한 다. 황윤희 시인도 “조용한 고요 속에 / 스스로를 가 둔 채” 깊은 사색에 빠진다. 그러나 이 시가 전하는 진정한 울림은 마지막에 있다. “오늘은 그냥, 숨만 쉬 어도 괜찮아.”라는 한마디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위로의 언어이다. 우리는 종종 힘내라는 격려보다, 그 동안 수고했다, 살아있어 고맙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도 괜찮다라는 표정이나 말이 더 큰 힘이 된다는 사 실을 이 시는 조용히 일깨워 준다. 이 시는 화려한 수 사나 복잡한 상징은 없지만,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감정을 담백하게 담아내어 읽는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 낸다.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하루 를, 때로는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도 있다는 사실 을 새삼 돌아보게 하는 따뜻한 작품이다. 만남을 이루니 어느덧 무관심이 찾아와 이별을 이룬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 본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슬픔이 밀려오고 그리움이 밀려온다. 꽉 찬 가슴이 눈물이 되어 흐른다.
190 이삭 만남과 이별은 나의 선택이라는 걸 황윤미 「이별의 후회」 전문 황윤미 시인의 「이별의 후회」는 사랑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잘못과 선택을 돌아보게 되는 인간의 심리를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기다리고 / 또 기 다려 본다. / 어제도 / 오늘도 / 내일도.”라는 반복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기다림을 표현한 다. 하루하루 이어지는 기다림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 라, 이미 끝난 관계를 쉽게 놓지 못하는 화자의 마음 을 보여 준다. 또한 “꽉 찬 가슴이 눈물이 되어 흐른 다.”는 표현은 후회와 그리움이 더 이상 마음속에 머 물지 못하고 끝내 눈물로 흘러내리는 순간을 보여준 다. 이별은 단순히 한 사람을 잃는 일이 아니라, 함께 했던 시간과 추억을 떠나보내는 일임을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마지막의 “만남과 이별은 나의 선택이라는 걸”이라는 깨달음은 이 시의 핵심이다. 화자는 상대를 탓하기보다 자신의 무관심과 선택을 돌아보며 이별의 책임을 스스로에게서 찾는다. 이러한 성찰은 후회를 넘어 삶을 배우는 과정으로 읽히며, 작품에 잔잔한 울 림을 더한다.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이별의 감 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공감을 이끌어내는 작품이다. 사랑은 만남만큼이나 서로를 향한 관심과 노력으로 이 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이별하고 나서야 만 남의 소중함을 깨닫는 인간의 모습을 담담한 언어로
191 전하고 있다. 이 시를 읽고 나면 우리는 항상 이별하 고 나서 깨닫는다. 소중한 만남을 지키지 못한 것은 우리의 무관심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게 하는 시이다. 우리에게 언제나 세상의 지팡이 되어 주셨던 아버지. 눈 오던 날 미끄러져 고관절 수술 후 아버지의 버팀목 되어 준 지팡이가 신발장 곁에 비스듬히 한겨울 바깥에서 뛰놀던 두 손 녹여주던 아랫목의 따스한 온기로 묵묵히 섰다. 지난 요양병원 방문에 어머니만 알아보시고 자식들 기억은 하나씩 지우개로 지우는 중이다. 가장 가벼운 영혼의 무게로 떠나실 준비하는 듯하다 끝이 닳은 지팡이 바닥에 묻은 먼지처럼 가벼운 한 영혼이 현관 옆 신발장에 기대어 어머니의 세상을 버티고 서 있다. 김정숙 「아버지의 지팡이」 전문
192 이삭 김정숙 「아버지의 지팡이」는 ‘지팡이’라는 사물을 통 해 아버지의 존재와 노년, 그리고 남겨진 어머니의 삶 까지 연결한 작품이다. 이 시는 한 자루의 지팡이에 아버지의 생애와 가족의 시간을 담아낸 따뜻하면서도 먹먹함을 느끼게 한다. 한때는 가족 모두의 버팀목이 었던 아버지가 이제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기억 마저 하나씩 놓아가는 노년의 현실을 담담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 과정을 과장하거나 비탄에 머물지 않 고, 조용한 시선으로 바라보기에 오히려 더 아픔이 느 껴진다. “어머니만 알아보시고 자식들 기억은 하나씩 지우개로 지우는 중이다”라는 대목에서는 기억을 잃어 가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현실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시는 슬픔을 격하게 드러내지 않고, 아버지 삶 의 마지막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태도를 유지한다. 이 러한 절제된 표현이 독자의 마음속에서 오히려 더 깊 은 슬픔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시는 늙어가는 부 모님의 노년과 바라보는 가족의 사랑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로 풀어내고 있다. 지팡이라는 평범하고 일상적 사물에 깊은 상징성을 부여한 서정시이다. 부 모님의 노년 삶에서 슬픔을 이야기하면서도 감사가 더 오래 남는, 잔잔하지만 깊은 여운을 전하는 작품이다. 천국 같은 그곳에서 지옥 같은 이곳으로 오신 그대여, 부디 황폐한 이 땅을 위해 기도하소서.
193 천국 같은 한국에서 지옥 같은 바티칸으로 오신 그대여, 부디 고독한 이 교황을 위해 기도하소서. 천국은 언제나 아득히 멀고 지옥은 이토록 숨결처럼 가까우니, 아, 마침내 나를 위해 기도하소서. 우리는, 진정 이리도 찬란한 지옥에서 살고 있단 말인가. 김현성 「프란치스코의 기도」 전문 김현성 시인의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프란치스코' 라는 존재를 통해 천국과 지옥의 위치를 뒤집어 놓는 역설을 중심축으로 삼고 있다. 마지막에는 그 역설이 사회 비판을 넘어 자기 존재의 성찰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짧지만 여운이 큰 작품이다. 이 시는 실제 로는 '프란치스코에게 바치는 기도'이기도 하고, '프란 치스코를 빌려 인간을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 이 시 를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신이 과연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신이 있다면 어째서 악인은 승승장구 하고, 선인이 핍박받는가 하는 문제이다. 기도는 더 이상 종교의 언어가 아니라 인간을 향한 절박한 호소 가 되었다. “우리는, 진정 / 이리도 찬란한 지옥에서 살고 있단 말인가.” 이 역설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다. 아마도 신이 없을 것이라는 강한 부정을 느끼게 한다.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194 이삭 ‘찬란한 지옥’이라는 한마디로 압축한 시인의 통찰이 인상적이다. 이 시는 특정 종교를 위한 작품이라기보 다, 인간다운 삶은 무엇이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디 를 향해 가고 있는가를 묻고 있다. 이 시는 큰 목소리 로 외치기보다, ‘천국과 지옥’, ‘멀고와 가깝고’, ‘찬란 한 지옥’ 등의 역설을 끝까지 밀어붙여 독자의 내면을 흔들며 깊은 질문을 남기는 작품이다. 풀잎에 맺힌 이슬 들판을 적시는데 연둣빛 짙어가는 성숙한 뒷산에는 버섯과 산나물이 성품 따라 자라나고 사철에 옷 한 벌 녹침으로 세운 절개 파고든 솔수염하늘소 뿌리치지 못하고 녹음 속에 갇힌 채 호령하던 기개 접어 붉은 도포 걸친 넋 하염없는 신음뿐 세월에 부침해두고 푸른 눈을 감다니 정영희 「소나무재선충」 전문 정영희 「소나무재선충」은 시조의 형식을 바탕으로 소나무재선충병이라는 생태적 비극을 선비의 절개와 몰락의 서사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특히 소나무를 단 순한 나무가 아니라 ‘선비’ 혹은 ‘충신’의 이미지로 의 인화한 점이 인상적이다. 소나무재선충병은 단순한 병충해가 아니라, 오랜 세 월 금수강산을 지켜온 소나무가 힘없이 쓰러지는 비극
195 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첫머리에서 펼쳐지는 들판과 뒷산의 풍경은 평화롭고 생명력이 넘친다. 풀잎의 이 슬과 산나물, 버섯이 어우러진 풍경은 자연의 조화와 풍요를 보여 주며, 그 한가운데 사철 푸른 소나무는 변함없는 절개와 의연함의 상징으로 우뚝 서 있다. 이 러한 평온한 분위기 덕분에 이후 찾아오는 소나무재선 충병에 감염된 소나무의 죽음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특히 “사철에 옷 한 벌 녹침으로 세운 절개”라는 구절 은 소나무를 선비의 인품에 비유한 뛰어난 표현이다. 늘 푸른 빛을 한결같은 절개로 형상화하여, 소나무가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오랜 세월 산을 지켜온 정신적 존재임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 굳건한 생명도 “파 고든 솔수염하늘소 뿌리치지 못하고”라는 한 줄 앞에 서 무너진다. “녹음 속에 갇힌 채 호령하던” 소나무를 쓰러뜨리는 것이 폭풍도, 번개도 아닌 작은 해충이라 는 사실은 자연의 야속함과 생명의 연약함을 새삼 일 깨운다. 이 땅의 산을 지켜온 절개를 지닌 소나무의 죽음을 통해 소나무재선충병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 고, 자연을 지켜야 할 책임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깊이 있는 시조이다. 2026년에 발간된 『이삭동인지 제2집』을 읽으면, 다 양한 시선으로 자연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작(詩作)의 폭과 깊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회원 들의 작품 세계가 더욱 풍성해지고 정서의 깊이가 한 층 성숙해 감을 지켜보는 일은 큰 기쁨이다. 이삭 문 우들이 바쁜 생활 가운데서도 각자 자기 나름의 언어 와 시 세계를 꾸준히 구축해 가고 있다는 것은 무척
196 이삭 고무적인 일이다. 해가 갈수록 이삭 동인지에 실린 시 들의 품격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해설 편에 실리지는 못했지만 좋은 작품들이 너무 많 았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이 글이 동인지에 담긴 작품 들의 깊이와 가치를 모두 헤아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 부족함은 평자의 한계로 남겨 두고, 독자 여러분께 서 작품 하나하나를 직접 만나 더 큰 울림을 발견하 시기를 바란다. 『이삭동인지』가 앞으로도 회원 각자의 개성을 존중 하면서 지역 문학을 넘어 우리 문단의 의미 있는 목 소리로 성장해 가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맺는다. ◈ 이광성 시인 2025년 《시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이삭문학협회 회장, 이학박사 시집 『아벨 방정식을 푸는 세 가지 방법』, 『내 옆에 길이 있어』(공저)
197 시인의 문장 (광성) 문명이 병들어 있으면 개인도 같은 병을 앓게 된다. 만약 그가 도전할 만큼 건강하면 그는 아웃사이드가 된다. - 콜린 윌슨 『아웃사이드』를 읽고 (원배) 시라는 것은 본래 불가능이고, 불가능을 표현하 려고 애쓰다가 실패하는 것. - 「‘시인들의 시인’ 이성복이 들려주는 시쓰기 방법론」 한겨레. (지윤) 가을은 모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다 - 알베르 카뮈 (남숙)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가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 조던 피터슨의 옥스퍼드대학교 강연 중 니체가 했다는 말 중. (동환) 또 하나의 자서전을 출간하며, 새로운 세상을 향해 더 큰 꿈, 더 많은 도전에 나선다. - 강동환 자작 (형순) 할 수 있는 한 훌륭한 인생을 만들라. 인생은 짧고 곧 지나간다. - 오울디즈
198 이삭 (임경) 희망은 좋은 것, 어쩌면 가장 좋은 것이다. - 스티븐 킹 (영배)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간다. 여기서부터 희 망이다. - 고은, 『길은 가면 뒤에 생기는 것』 중에서 (창희) 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 (오동은 천 년을 늙어도 가락을 품고 있고 매 화는 한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 신흠(申欽)의 한시 (부광) 모든 사람은 세상을 바꾸려 하지만 자신을 바 꾸려는 사람은 드물다 - 레프 톨스토이 (창래) 팔십부터 삶은 하루하루가 기적입니다. 깨고 나면 부활한 기분입니다. 옆에 웃음 주는 사람 있는 행복입니다. - 정창래 자작 (승익) 비가 온다고 하늘조차 흐린 것이 아니다. 하늘은 늘 구름 뒤에 밝게 빛나고 있다. - 여승익 자작
199 (수경) 가장 좋은 것도 없고 가장 못 한 것도 없다. 이때에 좋은 것이 있고 저때에 좋은 것이 있다. - 『섬』 장 그르니에 (1997, 민음사) (승희) 사랑의 상처는 사랑으로 치유할 수 없다는 걸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되고 마음속으로 끝난 다는 걸 이제는 깨달아야 한다 - 서정윤, 『홀로서기 3』 (연희) 수많은 날은 떠나갔어도 내 맘의 강물이 끝없 이 흐르네. 그날 그땐 지금 없어도 내 맘의 강 물 끝없이 흐르네. - 김연희 자작 (윤희) 배워서 남 주자! - 황윤희 슬로건 자작 (윤미) 꿈은 내일을 향한 희망이고, 시는 그 꿈을 비 추는 빛이다. - 황윤미 자작 (정숙) 천년을 걸어가는 꽃잎도 있었다. 나도 가만가만 천년을 걸어가는 사랑이 되고 싶었다. 한 우주 가 되고 싶었다. - 배한봉, 『복사꽃 아래 천년』
200 이삭 (현성) 여기 보이는 건 껍데기에 지나지 않아.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야… -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중에서 (영희) 물이 갖는 덕 중에 어떤 형태는 담기며, 주어진 환경에 맞게 자신을 바꾼다. - 노자
201 이삭에 관한 詩 이삭을 미분하면 눈알이 한 점으로 달린다 점 선 면이 모여 마당이 되고 식탁의 불빛은 밤새도록 적분한다. - 광성 파묻히는 각도로 올라오는 것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우리라고 한다. - 원배 노란 별빛 조각들이 모여들어 우리는 들판에서 황금 만찬을 차린다. - 지윤 선택받지 못한 홍시가 피드백을 기다리고 한때 야물었던 들녘에 낟알이 잠들어 있습니다. 배려의 이정표라 우기면서 - 남숙 시 낭송은 아름다운 여유를 준다. 더 많은 선생님들을 보강하면, 문우들의 열정으로 더욱 무르익어 간다. - 동환 거친 들판에 홀로 꼿꼿이 서서 비바람 맞으며 영근 생명의 열매 고개 숙여 세상에 따스함을 내어주네 - 형순